며느리 리포트

며느리 조건

by 바비줌마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조건들을 달며 그 조건에 스스로 맞추기도 하고, 혹은 누군가 내민 조건들에 맞추어야 하는 경우들을 접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조건이나 욕심들을 채우기 위해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꼭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에서만 이런 조건이나 자격들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집안에 사람을 맞이하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자격이나 조건, 혹은 욕심을 내게 된다.

어느 집이나 아들이 있고, 딸이 있으면 자신의 자녀들에게 무한 욕심을 갖게 된다.
누구보다 똑똑하기를 바라서 어려서부터 영재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또 자라면서는 명문학교에 들어가길 바라고, 직장도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에 들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결혼할 때가 되면 무엇보다 가장 큰 욕심을 드러내어 그들 배우자에 대한 욕심에는 제한이 없게 되는데 수 십 년간 품 안에 키우며 내 자식이 최고인 줄 알았기에 어떤 배우자를 갖다 붙여도 사실 아깝고 손해 보는 듯하여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늘 기대치가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혹은 결혼의 약속이 깨져버리는 경우들도 간혹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또는 배우자를 통해서 보상받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수십 년 정성을 다 해 키워온 자식이니 얼마나 그 기대하는 바가 크겠는가. 그러나 그 기대치를 채우게 되어도 또 채우지 못하게 되어도 어느 정도의 문제점은 생기는 것 같다.
무엇이든 내 욕심을 다 채우려면 그만한 대가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 물질로나 마음으로나 무리수가 따르게 되고, 기대치를 다 못 채우게 되면 또 그것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으로 계속적으로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등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몸무게 65kg 이상, 키 160cm 이상, 시력 1.5 이상,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시가의 며느리가 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이었다.
어느 회사는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회사 직원을 채용하는 곳도 있지만 어디 유명한 대기업의 사원 모집도 아닌데 이런 조건들이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이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일단 시가의 며느리가 될 후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명문대 출신이거나 요즘 흔히 말하는 열쇠나 명품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이것 또한 이런 조건들에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만만치 않은 조건이다.

정작 결혼을 해야 하는 당사자인 남편이나 시동생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조건은 그렇다 쳐도 '어디 레슬링 선수나 씨름 선수를 뽑냐고 몸무게가 65kg이 뭐냐'고 항의를 하겠지만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나름 고심을 한 후의 결정이었다. 시어머니가 65kg이 넘었고, 그래서 아들을 셋이나 잘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시할아버지가 키가 유난히 작아서 그런지 시아버지는 그렇게 작지 않은데 시 작은아버지나 시동생의 키가 좀 작고, 시가의 모든 식구가 안경을 쓰다 보니 3대까지는 종자를 바꿔주어야 한다는 자신들만의 종족 변형론에 따라 이런 조건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구나 시가의 모든 친척까지 다 모여야 20명을 갓 넘길 정도니 종족 번식에 대한 욕심도 생겨 애 잘 낳는 튼튼한 며느리를 보고 싶은 것이 소박하다면 소박한 욕심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요하게 뽑았던 세 가지의 조건을 하나씩 그것도 아주 크게 못 갖춘 3명의 며느리들을 시가에서는 맞이하게 됐다는 것이다.
맏며느리인 나는 체중이 미달되어도 한참 모자라 마르다 못해 어디 폐병이라도 걸렸나 싶게 너무 말라서 시할아버지께 첫 선을 보일 때 시어머니와 코미디 같은 쇼를 하였고, 둘째 며느리는 키가 유난히 작아

"저런 사람을 어디서 찾아왔냐"라고 시할아버지가 호통칠 정도였고, 막내며느리는 안경을 안 쓰면 벽인지, 문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시력을 갖고 있었다.

처음 막내 동서와 맞선을 보는 자리에는 렌즈를 끼고 나와서 알 수가 없었기에 막내며느리만큼은 나름대로 기본 조건에 충실하다 싶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우연히 안경 낀 모습을 보고 눈이 나쁜 줄 알았으니 이런 우스운 경우도 없을 것이다. 그 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명절에 다 같이 시골에 모인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동서는 이른 아침잠에서 깨어 미처 렌즈를 끼지 못하고 안경을 쓰고 방에서 나오는데 뱅글뱅글 도는 두꺼운 안경 낀 모습을 처음 보는 우리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보았었다. 그런 우리를 막내동서는 이상하게 쳐다보고, 우리는 뒤늦게 팽팽 도는 안경알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었다. 인간의 욕심에 한 방 제대로 맞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안경이나 렌즈를 안 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기에 그걸 굳이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없겠으나 20여 년 전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고, 굳이 그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기에 더욱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면 그다음엔 상견례를 통해 서로 가족 간에 소개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며 교제를 갖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양가 집안의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이 대부분의 절차일 것이다.
특히나 집안의 어른들이 계시다면 더욱 그런 절차들이 중요할 것인데 여러 지방색을 유난히 따지던 시할아버지가 인사를 하러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날 보기 위해 일부러 왔다며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그때는 졸업을 하기 전부터 미리 직장을 다니던 터라 남편과 방문날짜를 조정 중이었는데 갑자기 방문했다는 연락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찾아뵙기로 했는데 시어머니가 갑자기 오늘 무슨 옷을 입었냐고 묻는다. 직장엘 다니던 터라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입었다고 하니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며

“집에 잠깐 들러서 바꾸어 입고 오는 건 무리겠지?”라고 묻는다.
시간상 그것은 어려울 것 같아

“그럼, 내일 찾아뵐까요?”라는 말에 아니라며 그냥 오늘 오라고 하여서 가겠다고 했더니 이번엔 대문을 미리 열어놓을 테니 살짝 들어와 뒤 주방 쪽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꼬치꼬치 묻기도 어려워 알겠다고 하고 점심시간에 잠시 외출을 허락받은 후 시어머니가 들어오라는 대로 주방 쪽으로 갔더니 언제부터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다린 듯한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주방에 딸린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나를 위, 아래로 몇 번이나 훑어보더니 스커트 안에 넣은 블라우스를 빼라는 것이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수건을 가져와 블라우스를 꺼내고 스커트 위 허리 부분에 수건을 둘둘 만 후에 옷핀으로 고정을 하고 블라우스로 그 위를 덮으니 이건 뭐 말 그대로 가운데 배만 불룩한 오뚝이의 형상이다.

20대였을 때는 45kg도 안 나가던 체중에 천성적으로 어깨도 좁고, 팔도 짧고, 그나마 키는 160cm를 넘으니 웬만한데 갑자기 배만 불룩한 형상이 어이도 없었지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순간 ‘내가 임신을 했다고 해야 하는 상황인가’ 싶기도 하고, ‘결혼을 반대하시나’ 하는 생각도 들고 오만 가지 생각이 겹겹이 드는데 시간이 없을 테니 잠깐 후다닥 보여드리자고 한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는데 이건 내 스스로도 너무나 어색해서 자꾸 배만 가리게 되고, 시할아버지는 뭔가 수상하다 싶은지 수시로 배 쪽으로 시선이 오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불편한 가운데 몇 가지 질문에 겨우 대답을 하고 허겁지겁 나왔다. 불과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텐데 3시간 정도는 족히 지난 듯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나중에 안 것인데 시가의 며느리 조건은 시부모를 비롯하여 모두가 안경을 껴서 눈이 안 좋으니 시력이 좋은 며느리, 시할아버지를 비롯하여 키가 작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키는 160cm 이상, 시가의 전체 가족수라고 해야 20여 명일 정도로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몸이 약하면 안 되니 체중은 65kg 이상이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단다.
그런데 나는 그중 눈은 좋고, 키도 합격선인데 체중이 턱없이 모자라 시할아버지의 흡족한 만족을 위해 시어머니가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리고 시할아버지는 체격은 작은 듯한데 배만 유난히 나와 있어 내가 돌아간 후에

“아가 얼라를 가졌냐”라고 물어서 아니라고 대답을 했는데 결혼식 날 드레스를 입은 날보고 너무 말라서 혹여 시부모가 힘들게 하여 내가 마른 줄 알고 시부모를 엄청 나무랐다고 들었다. 결국 시어머니의 눈물 나는 노력이 도리어 헛되다 못해 안 들어도 될 잔소리까지 듣게 한 결과가 되었다.

시가가 경상도이다 보니 시어머니와 시 작은어머니까지 모두 경상도 사람이고, 사투리 말투에서 느껴지는 투박함 때문인지 시할아버지는 매번 날보며

“넌 어찌 그리 연하노”하며 예뻐해 주셨는데 아무래도 경상도 말투가 아니다보니 서울말이 듣기에 부드러웠나 보다.
그리고 장손 맏며느리가 누려야 할 대접은 사실 시할아버지가 다 해 준 듯하다.
명절이라도 되어 시할아버지가 있는 시골집에 가면 모든 식구가 모였기에 당연히 밥상이 남자 밥상, 여자 밥상으로 나뉘는데 그럴 때도 나에게

“이리 내 옆에 와서 먹어라”라고 했고, 따로 앉게 되면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라며 뭔가 더 챙겨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 내가 먹는 밥상에도 있는데 두 개의 밥상을 넘어 내게 전달되는 음식도 많았다.
오가다 길에서 밤이라도 몇 알 주워 오면

“이거 먹어봐라 토종 밤이라 달다.”라며 쥐어주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수삼을 사서 보내주며

“내 삼 보냈다. 먹고 건강 하래이”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할아버지 집에 가기만 하면

“뭐 먹고 싶은 것 없노? 할미한테 다 말해라” 하며 허허 웃었던 시할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눈에 보는 듯 생생하다.
그런 시할아버지를 보며 시할머니가

”할아버지는 널 보기만 해도 좋은 갑다“라며 한 마디씩 하면 그저 허허 웃으며

”다 이쁘다 “라고 하였다.
한 집안의 가장 어른인 시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다소 황당하고, 코미디 같은 쇼까지 하며 어색하였지만 종손 맏며느리라는 이름 때문에 어쩌면 더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 같아 시할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의 시간들이 여전히 그립다.




이렇듯 시가의 입장에서는 한 가지씩 결격사유라면 결격사유가 되는 며느리들이 들어왔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완벽한 며느리 조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부모는 막상 조건만 내세웠지 이런 부족함을 가진 며느리들이 좋은지, 안 좋은지 함께 살면서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시부모가 있지 않은 가정에 들어와서 부족한 모습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 말할지 사실 궁금하다.
시부모 대신 맏동서의 의견에 전폭적인 지지로 따라주고, 시가의 모든 행사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른들이 있어도 분쟁이 생기고, 잘 모이지 않는 것이 요즘 대부분 가정의 모습인데 우리는 부모와 상관없이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서로 어려운 일이나 즐거운 일을 늘 함께 나눈다.
말이 쉽지 1년에 18번 이상 되는 시가의 모임에 불평이나 군소리 한 마디 없이 함께 한다는 것은 요즘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사실 요즘은 여러 형편들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시부모와 시조부모의 추모일과 시 작은 부모의 생일, 그리고 명절이나 이사하는 등 특별한 날에만 모이게 되었는데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사촌 시동생과 사촌동서들의 생일까지 챙기며 서로의 가정을 오가고, 또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며, 찬양하고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정말 인의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가족의 모습으로 살았다.
어쩌면 이런 모습을 원해 시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조건들을 내세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그 덕에 우리 가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한다.

그렇게 많은 모임을 한다는 것도 부러워하고, 잘 따라주는 동서들을 부러워하고, 시부모를 비롯한 시가 형제들과도 잘 지내기 어려운데 어떻게 시 작은집의 가족들과도 잘 지내는지, 그리고 모두가 신앙 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 자체를 부러워한다.



우리 며느리들은 1년에 한, 두 번 정도의 모임을 별도로 갖는다.
우리 스스로 ‘0가네 여인들의 모임’이라고 부르는데 시부모는 없으니 시 작은어머니를 주축으로 큰 집인 우리 집 며느리 3명과 작은집의 며느리 둘까지 합하여 다섯 며느리와 시 작은집의 딸인 시누이까지 일곱 명의 여자들만 강남에서 모여 영화도 보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분위기 있게 식사도 하고, 시간의 여유가 되면 노래방까지 가서 모처럼 여자들만의 시간을 멋지게 갖는다.
아이들은 모두 시동생들이 일찍 퇴근하여 보다가 끝날 시간쯤 되면 다시 강남으로 와서 동서들을 태워간다.
그 날 하루는 ‘0가네 여자들’ 모두가 공주가 되고, 여왕이 되어 스스로 대접하고 또 대접을 받는 날이다. 그러면서 더욱 ‘0가네 사람들’ 로써 관계를 돈독히 하고 쌓인 스트레스도 푼다.
남편들의 흉뿐만 아니라 ‘0가네 남자들’의 단점도 모두 싸잡아 지적하며 각자 성은 다르지만 며느리들끼리도 한 가족이고 하나의 형제라는데 의견을 모은다. 더구나 시 작은어머니는 어찌 보면 시어머니의 위치에 있지만 늘 며느리들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 입장을 우선시 해 주었기 때문에 같은 며느리들의 입장에서 함께 해 주는 거라고 느끼기에 더욱 든든하고 힘이 된다.
이런 것이 별 것이 아닌 것 같지만 힘들 때 어디에다 하소연을 풀어놓아야 하나 하고 망설임을 가질 때 바로 옆에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어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밖으로 나가 흉허물을 들추는 일이 생기지 않게 된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우리가 있었던 방의 문을 열고 나가더니 갑자기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 노래를 폼 나게 부르며 들어오던 시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모두가 뭐지 하며 멍하니 있다가 동시에 웃음이 빵 터져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던 일이 지금도 어제 본 듯이 생생한데 아마도 이런 추억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서로를 묶어주고,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것 같다.
더구나 이런 일에 시가의 어느 남자 하나 태클을 거는 사람이 없다. 도리어 기부를 할 테니 맘껏 맛있게 먹으며 좋은 시간을 가지라고 서로 격려를 해 주었다.
이런 배려와 나눔이 있었기에 이제껏 살면서 며느리들 간이나 고부간에 갈등 없이 지내온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며느리들만의 시간도 이제는 잘 내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직장이 생기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제약들로 엄마들의 자유시간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sns를 통해서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생일을 축하하고 작은 일 하나도 서로 나누며 소통한다. 비록 매번 생일에 다 모이지는 못하지만 그런 날에는 새벽부터 축하 메시지가 넘쳐난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동서들의 생일인데 만나지 못하면 생일 케이크라도 별도로 보내며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마음과 정성을 들인 시간들은 마치 기초공사가 잘된 것처럼 지금껏 살아가는데 튼튼한 지지대로서의 역할을 잘해 주는 것 같다. 그리고 각자 성은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자매들만의 사랑과 우정이 생긴 것 같다.

나 역시 동서나 시가식구들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이제껏 친정에 가서 시가의 흉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인 이상 시가나 남편의 흉이 자신의 흉이라는 생각에 늘 자랑만 해서 친정에서는 세상에 그지없는 사위에, 더할 나위 없는 시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약간의 하소연은 친구들에겐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흉이 될 정도는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서운함 정도로만 털어놓지, 그것이 흉허물이 되어 되돌아올 정도는 동서나 시 작은어머니에게 풀어놓는데 시부모가 없다 보니 시 작은집의 부모를 시부모 삼아 지내던 것이 이제는 진짜 시부모처럼 의지하고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선택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고 자신을 스스로 세워나가는 인격이라고 생각하기에 지금껏 이렇게 살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거짓말을 반복하다 보면 그 거짓말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했는데 그렇게 좋은 점들만 바라보고 살다 보니 진짜로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갖고 이런 생각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되거나 처음부터 되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도 해야 하고 또 웃어른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무엇이든 나누는 데에 인색하지 않아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좀 손해 보지, 내가 좀 덜 먹지, 내가 조금 더 일하면 어때, 힘든 일이야? 그럼, 내가 하지’ 하는 자세와 생각들을 보고 배우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면 가능하게 된다고 본다.
어른이라고 해서 권위만 내세우고, 대접만 받으려고 한다면 이런 관계가 성립되는 건 불가능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알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또한 줄줄 안다고 생각한다. 받아 보지 않아서 어떻게 주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호된 시집살이를 한 사람이 자신은 절대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지만 배운 도둑질이라고 본인이 받은 것이 그것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동일하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있지만 자신은 그런 행동들이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인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받은 그대로 할 뿐이기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힘든 것인지 아닌지를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0가네 며느리’가 된 지 3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하나씩 혹은 두, 세 가지의 부족함 속에서 서로 출발했지만 조건보다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살면서 배웠다. 비록 몸무게가 모자라고, 키가 좀 작고, 눈이 나쁘면 어떠랴. 서로 맞추어 가고 서로 사랑하는 데는 몸무게도, 키도, 시력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살면서 더 많은 부족함을 알아가도 사랑하는 데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고, 섬기는 데는 건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 결혼하려면 필요하다는 혼수 품목이나 내로라하는 며느리 조건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지만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도리어 그런 조건들이 없기에 서로를 더 긍휼히 여기고, 서로를 더 챙기면서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는 기쁨까지 맛보며 사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조금은 부족한 며느리들이어서 더 겸손할 수 있었기에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