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면서 매일매일의 일상이 있고, 누구에게나 정해진 하루의 일이 있다.
할 일이 정해지지 않은 백수도 백수로서 아침 기상부터 시작해 자기만의 즐길 거리를 찾거나, 하다못해 하루 종일 배회하거나, 집에서 뒹굴거나, 취직 준비를 하거나, 무엇을 하든 나름대로의 일정이 있을 것이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더욱 바쁜 일정이 있을 것이지만 자기가 정하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지고, 혹은 일의 진척에 따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에게 일과가 있듯이 며느리에게도 결혼하는 순간부터 며느리로서 해야 하는 일정이 생긴다. 더구나 결혼하여 남편과 둘이 사는 게 아니라 남편없이 시가에서 살게 된다면 더욱 며느리에게 주어진 일상은 주체가 며느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사람들이 되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 일정을 짤 수도 없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생각 치도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에 처음 며느리를 맞았는데 바로 서울로 가버리면 서운할 듯하여 사실 며칠 정도만 시부모와 함께 지내다 남편을 따라 서울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인사를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은 뒤 시아버지가
"당분간 너는 우리랑 살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의 본 뜻은 모른 체 원래 그러기로 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예."라고 대답을 선뜻했다.
그러자 '좀 더 오래 같이 살고 싶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보고 나니 딸이 생긴 것 같아서 같이 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만 셋이 있던 시가에 여자가 하나 들어와 알록달록 한복을 입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눈치를 보며 그 말을 하는데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리 해보고 싶은 것이라 생각하여 남편과 상의도 하지 않은 체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래서 준비해 온 내 살림살이도 서울로 보내지 않고 1층과 2층에 나누어 구석구석 쌓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살림살이들이 시가에 있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한동안 같이 살기로 했기에 그 후에 내가 갈 때 모두 챙겨서 가져가게 하려고 그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2층의 내가 머물 장소에는 이미 텔레비전과 화장대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있었고, 방이 좁아 아래층에 장롱을 따로 두고 옷과 이불까지 정리해서 넣어둔 걸 보니 오랜 시간 있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만약에 내가 싫다고 대답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그 상황은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아버지의 정해진 일정에 괜한 질문과 엉뚱한 대답으로 처음부터 불편함과 어색함으로 결혼생활을 할 뻔했던 것인데 단순하게 생각한 내 머리가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이른 아침에 남편은 서울로 올라가고, 신랑 없는 새색시로서의 시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가는 집안에서 2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2층을 혼자 쓰고 있었는데 쓸 때는 좋지만 청소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가 4월 10일경인데 한복을 입고, 2층을 오가며 청소하는 것이 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결혼한 새댁이 신혼 초 어느 기간 한복을 입는 건 요즘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는 폐백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아 한복을 입기는 하는지 사실 궁금하다.
내가 결혼을 할 때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 하루, 이틀 정도는 형편에 따라 입기도 했는데 요즘은 아예 한복을 맞추지 않고 잠시 빌려서 입는 추세도 많아지고 '스몰웨딩'이 유행을 타면서 더욱 한복을 입는 것은 많이 사라진 듯하다. 이런 추세에 한복을 입고 몇 달씩 생활한다는 것은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나마 형식을 갖추는 집에서는 대부분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는 1~2일도 길다면 길다고 할 텐데 간혹 독특하게 1주일 정도 입는다면 그 역시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그런 일이 이제는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니 얼마나 많이 바뀐 풍습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친정엄마의 욕심으로 몇 달이나 한복을 입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신혼 초가 아니면 언제 한복을 입어볼 수 있느냐며 이때 입는 것이 제일 예쁘니 며칠 입으라고 빨래 후 바꿀 저고리 동정까지 챙겨서 물 빨래가 가능한 한복으로 두 벌을 더 지어주었다. 그래서 갑자기 시가에서도 살게 되었고, 또 기왕 입는 것이니 나름 열심히 저고리와 치마를 서로 바꾸어 입어가며 이렇게도 입어보고, 저렇게도 입어 보는 등 그 상황을 즐기면서 예쁘게 입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부터 곱디 고운 원색의 한복을 입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새댁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시아버지를 배웅하고 맞느라 들락거리는 모습이 동네 어른들 보기에도 좋았던 모양이다. 그것이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었던지 아주머니들이 모이기만 하면 한복이 늘 화두가 되었다고 한다.
그 덕에 시어머니는 신이 나서인지 하루는 시장에 가는 길에 한복집으로 데리고 가서 한복을 새로 또 지어주었다.
첨엔 어느 정도 그런 기분이 이해도 되고, 내심 한복이 잘 어울려서 그러나 보다며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해 기꺼운 마음으로 동정을 바꿔 달아 가며 즐겁게 입었는데 시가의 골목길에 함께 사는 가장 가까이 지내던 시어머니 지인이 새로운 한복을 또 지어온 것이다. 그런데 난 새로 가져온 한복보다 어떻게 내 사이즈를 알았을까가 더 궁금했는데 시어머니가 옥상에 빨아 널었던 내 한복 한 벌을 빌려주어 사이즈를 맞추었다니 그 정성에 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발이 되어 시어머니가 빌려주었다던 한복이 표본이 되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집에서도, 건너 집에서도, 뒷집에서도 색깔도, 디자인도 다양하게 만든 한복을 1주일 간격으로 가져오는 바람에 4월부터 입기 시작해 6월이 다 가고 7월이 되도록 한복을 입어야 했다.
시가가 있던 골목은 말 그대로 그 지방의 유지들이 유난히 많이 살던 곳이다.
나이도 시어머니 또래의 부부들만 사는 집들이 많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며느리를 본 시가가 부럽기도 하고, 또 새댁이 알록달록 입고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기도 좋다며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으로 들고 온 것이니 마다할 수도 없어 유난히 땀도, 더위도 많이 타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이 시집살이구나!' 싶었다.
옷도 입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입을 수도 없고, 싫어도 싫다고 말 한마디 할 수가 없고, 내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해야 하는 것이 시집살이구나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입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매일 저녁마다 한복을 다 벗어던지고 속옷만 달랑 입고 맨바닥에 누워있을 때가 사실 제일 행복했다. 행복이라는 게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도 그 순간에 들었다.
한복이라는 게 겉옷 하나만 입는 것이 아니라 속옷부터 버선까지 받쳐 입어야 하고 움직이기 편하게 추스르려면 앞치마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초여름으로 치닫는 계절에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덥고 불편한 옷이한복이다. 더구나 움직일 때마다 스치는 질감은 면이 아니기에 땀이 난 상태에서는 더욱 피부에 쓸려서 따갑고 아프기까지 했다.
매일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빨리 한복을 벗을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하루에 한 번씩 새 한복을 입고,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입은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다음에 빨리 끝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이 만들어준 한복을 입었을 때가 제일 예뻤다며 자랑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즐거워하는데 그만 벗겠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어느새 내 고통이나 불편함과는 상관없이 한복을 입은 나는 그 골목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복을 입고 가만히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만도 불편하고 힘든데 이른 아침부터 오후에 잠시 시장에 가는 시간을 빼고는 밥을 할 때나 청소를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늘 입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나 자신 외에 누군가를 내 몸에 하나 더 얹어놓고 다니는 것처럼 걸리적거리고 무거웠다.
청소를 할 때는 치마며 저고리 고름이 발에 밟혀서 치마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저고리 고름을 여기 쑤셔 넣었다 저기 쑤셔 넣었다를 수 없이 해야만 가능했고, 장독대가 있는 옥상에라도 올라갈라치면 앞에서 밟히고, 뒤에서 끌리는 치마로 인해 손 하나가 사실 더 필요했다.
그러나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원색의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사람이 하얀 앞치마까지 두르고 인형처럼 다소곳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사실 보기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7월도 한 주가 다 갈 무렵 아무 말도 없이 무조건 반팔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천사가 날개를 달면 이리 가벼울까 싶을 정도로 정말 어디론가 몸이 저절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을 먼저 본 시어머니는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왜 한복을 그새 벗었냐며 몹시도 실망스러워했지만 금세 그 주 주말까지만 더 입고 벗자는 걸로 합의를 하면서 그것도 많이 봐준다는 표정이었다.
"네 시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사무실 가서 매일 며느리 자랑한단다, 한복 입은 며느리 봤냐"라고, 지금이니까 입지 나중에는 입고 싶어도 어울리지 않아서 못 입는데 그새 벗었냐며 이미 한복을 벗어버린 내가 마치 알몸으로 홀딱 벗겨진 것처럼 어찌할 줄 모르도록 여러 상황들을 늘어놓으며 아쉬워했다.
한편 좀 더 참을 걸 그랬나 하는 마음으로 내 자신을 잠시 원망도 해 보았지만 그러다가는 1년이라도 입을 것 같은 마음에 아쉬워하는 시부모에게는 미안했지만 정말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는 결론을 냈었다.
그렇게 해서 길고 긴 한복 생활이 서서히 막을 내렸는데 사실 벗으면서 다시는 한복을 안 입을 거라고 팽개치듯 던져버리고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젠 도리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 입었던 한복들을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지금껏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번 짐 정리를 하면서 친정어머니가 입지도 않을 걸 왜 들고 다니냐며 버리라는 소리에 아쉽기는 했지만 색도 바래고, 둘 곳도 마땅치 않아 버렸다.
그렇게 옷 입은 모습 하나하나까지도 예쁘게 관심 있게 봐주는 사람이 이젠 몇이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갖지도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새 옷을 입어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도, 예쁘던 예쁘지 않던 관심도 없는 남편에 비한다면 동네 사람들에게 작은 몸짓 하나에도 온통 사랑받던 오래전 그 새댁이 그립기도 하다.
즐겁거나 감명 깊었던 일도 오래 기억에 남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것은 그만큼의 깊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에게 즐거운 일이라면 물론 기꺼운 마음으로 했을 것이지만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는 그저 덥고, 불편했지만 내 자신보다는 시부모와 동네 어른들을 생각하며 입었었기에 더 오래 따뜻하게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도 한복을 곱게 입고 지나가는 신혼부부들을 보면 그 시절 그 골목의 새댁이 생각난다.
여전히 활짝 웃으며 나풀거리는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고 곱게 수놓은 하얀 앞치마를 둘렀던 그 새댁이 지금은 60을 코 앞에 두고 노년의 세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던 새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시절 불편했던 한복을 입을 수밖에 없이 만들었던 친정엄마와 시부모에게 이제는 감사하게 된다.
그런 한복을 입고 하루종일 종종거리다 저녁에 방으로 들어가면 방 입구에서부터 하나씩 한복을 벗어던지고 속옷만 입고 대자로 벌렁 누워 있으면 날아갈 듯이 시원했다. 사실 말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누가 속바지, 속치마를 입고 한복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사는지, 까슬까슬한 한복 저고리로 이미 겨드랑이는 따가워서 옷이 닿기만 해도 아팠다.
더구나 지병을 앓고 있어서 꼬박꼬박 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 시아버지가 있었기에 게으름을 피울 시간도 없었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나서 점심 준비하면 12시 때 맞추어서 시아버지를 맞기도 바빴다.
그리고 셋이 먹는 점심이지만 상은 따로 두 개를 봐야 했다. 더구나 두 개의 밥상에 세 가지 식성으로 차리는 밥상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질환을 앓고 있던 시아버지는 고단백으로, 당뇨와 혈압이 있는 시어머니는 모든 양념을 뺀 본연의 푸성귀와 원재료를 그대로 먹었고, 지극히 정상이었던 난 양념도, 간도 적당히 다 들어간 반찬으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니 시금치 하나만 무치더라도 시어머니는 살짝 데쳐서 잘게 칼질을 넣은 그대로 밥상에 오르고, 고단백으로만 먹어야 했던 시아버지는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고, 간은 거의 안 한 상태로, 난 기름도, 깨소금도, 간도 모두 적당히 들어간 것으로 해야 하니, 한 가지 반찬이어도 세 가지를 하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간혹 상에 올릴 때 헷갈려서 뒤죽박죽이 된 적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그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현실이 아닌 삶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어느 집이 그렇게 복잡하게 먹고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모두가 건강했던 친정에서는 생각 치도 못 했던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고 하루 이틀이지 모든 반찬과 밥도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해야 하기 때문에 부엌일에 서투른 나로서는 밥을 하는지, 반찬을 하는지 매일이 실수로 만들어진 음식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시동생과 남편이 있을 때였는데 입이 짧은 친정의 식습관대로 예쁜 접시에 반찬을 조금씩 올려 모양 좋게 세 개의 상에 나누어서 안방으로 시동생이 들고 갔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뒤늦게 물과 컵을 쟁반에 담아 들고 방에 들어갔는데 밥상의 밥은 그대로 있는데 반찬의 접시들이 모두 비어있는 게 아닌가. 순간 반찬을 안 놓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엌으로 달려 나와 반찬을 담았던 통들이 비어있는 걸 보니 분명 가져간 것 같은데 이상하여서 남편과 시동생에게 여기 반찬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간 보라고 놓은 거 아냐? 간은 맞던데.." 하면서 도리어 날 의아하게 쳐다보는 게 아닌가.
세상에, 간 보라고.. 무슨 간 보는 걸 남자들에게 그것도 밥상에 올려서 가져간단 말인가.. 왜 다 먹었냐고 눈치로 구박을 해 보았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 날은 밑반찬이 없는 시가였기에 김과 김치만 놓고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입이 짧은 친정식구들처럼 반찬을 조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조금씩 한 데다가 세 군데로 나뉘어 놓으니 정말 간 보기라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뒤늦게 이렇게 반찬을 많이 먹는 집이라는 걸 준비하는 동안 지켜봤으면서도 시어머니는 왜 알려주지 않고 골탕을 먹였는지 만 약 올라 했는데 이야기를 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으니 급하지 않은데 하나하나 하면서 스스로 알아가기를 바랐다고 한다.
또 식사 후에도 시부모는 각자 먹는 약이 한 바구니씩 되었는데 약에 대해서 모르던 내가 가끔 바꾸어서 갖다 주는 난처한 일도 많았다.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바구니가 바뀐 것을 모르고 계속 바구니를 뒤지며 당신들이 먹던 약을 찾는 것을 보고 아차 싶어서 얼른 두 개를 바꾸어 주면 어이없어하며 한바탕 시원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사실 간질환이 모두 옮는 병이 아닌데도 시아버지는 위생에 철저했다. 그리고 시어머니도 매 번 삶아서 수저를 소독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많이 말랐던 내게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를 시킬 나이인데 밥 먹는 것이 그게 뭐냐며 식사 때마다 매 번 잔소리를 해서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은 적도 많았다.
'익모초'라고 무지하게 쓴 한약재를 말린 것도 쓴데 생 잎을 구해 와서 입 맛이 없는 사람에게 좋다고 죄지은 사람에게 사약 내리듯 주곤 다 먹도록 지켜보던 시아버지였다. 중간에 너무 써서 먹다가 토하면 안쓰러워하며
"약도 하나 제대로 못 먹나?" 하곤 얼른 사탕부터 챙겨주었다.
겨우 두 모금을 마시고, 밥 잘 먹겠다고 약속하자 포기하며 아쉬워했는데 시아버지는 왠지 그것을 다 먹어야 밥을 잘 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 시부모의 넘치는 사랑이 있어서였는지 남편 없이 혼자 남아서 하는 시가 살이가 그렇게 외롭거나 서글픈 것만은 아니었다.
" 저와 같이 살고 싶으시다고요? 그러죠 뭐.. 까짓 거.. " 그 마음은 지금도 같다.
그러나 지금은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도 아무도 옆에 있지 않아 그 말이 빈 메아리가 되어 내게 무의미하게 되돌아오는 것이 슬프다.
이젠 밥도 더 잘 먹고, 약 바구니도 바뀌지 않게, 음식도 간 맞춰, 식성에 맞추어서 잘할 수 있는데 그걸 받을 시부모들이 없다.
가끔 시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렇게 말한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남편 흉을 보고 싶어도, 시동생의 부족함이나 동서의 잘못됨을 나무라 달라고 하소연할 데도 없고, 응석 부리거나 투덜거릴 데가 없는 것보다는 부족하고 서로 맘에 안 들어도 그런 걸 편하게 토해낼 시가가 있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다르기에 뭔 소리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시가식구의 흉은 시가에서 봐야지 친정식구들에게 해 봤자 누워서 침 뱉기인 데다가 해결할 방법도 없으면서 서로의 마음만 상하고 사돈지간에 서운함만 쌓아갈 뿐이기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속상할 때 특히나 시부모가 그립다.
이전에는 시부모가 같이 살고 싶다고 했는데 이젠 내가 같이 살면서 하소연도 하고, 가슴속의 묻어둔 이야기도 풀어내고 싶은데 그런 이 며느리의 마음을 아는지......!
어느덧 두 분의 빈자리는 30년이 넘었다.
유난히 짧은 삶을 살려고 그렇게 풍성한 사랑을 처음부터 들이부어주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시부모와의 일은 어제 일처럼 하나하나 머릿속에 생생하다. 도리어 남편하고의 일보다 시부모와의 일들이 더 기억에 많다.
저녁에 다 같이 둘러앉아 '수사반장'이라는 TV 프로 보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시아버지의 모습이며, 저녁마다 무를 깎아주며 먹으라고 권하던 시어머니의 모습도, 어제 본 듯한데 더 이상 뵐 수가 없다.
고등학생, 대학생이던 시동생들도 이제는 다 결혼해서 아이들을 셋씩이나 낳았는데 그런 모습도 못 보고, 그렇게 예뻐하던 첫 손녀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아시는지......
이제는 시부모들이 자녀들과 같이 살려고 하지 않는단다. 도리어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 살려고 한다는데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자식들의 섬김을 받기보다 자식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 현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더 부담스럽고, 따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난 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더 듣고 싶다.
"우리랑 같이 살자"
질문이 아니라 거절할 수 없었던 간절함 같던 그 말을!
그러나 이제 갓 결혼한 며느리는 결혼 전처럼 늦잠을 잘 수도 없고, 먹고 싶을 때 먹거나, 먹기 싫다고 안 먹을 수도 없고, 마치 일이 있는 것처럼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남편이 아닌 시아버지의 출근시간에 맞춰서 일어나야 하고, 밥을 먹는 시간은 시아버지가 약을 먹기에 알맞은 시간에 맞추어 먹어야 하고, 청소하는 시간은 시아버지가 출근한 다음에, 그리고 빨래는 청소가 끝난 뒤에 청소하면서 이 방, 저 방에서 나온 빨래와 청소한 걸레를 함께 빨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했지만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게 아니라 시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며 시아버지의 스케줄에 따라 내 하루의 일정이 함께 짜여졌다.
남편은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가 토요일이나 되어야 내가 있는 시가로 내려오기에 내가 시중들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남편을 뺀 나머지 시가식구들이다.
밥을 먹는 것도,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웃는 것도 남편이 아닌 시가식구들과 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일정에 내 하루의 일과가 정해지는 것이다.
밥과 반찬을 시부모의 식성에 따라 늘 따로따로 해야 하기 때문에 분주함과 정신없음은 음식을 준비하는 아침시간부터 이어지고, 소독을 해야 하는 관계로 부엌의 가스 불엔 늘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수저가 끓고 나면 행주가, 그다음엔 수건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옷이나 걸레 등 빨래 삶는 냄새가 하루종일 온 집안을 소독했다.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잠시의 쉬는 시간도 없이 12시면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오는 시아버지의 식사를 다시 준비해야 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야 하는 시아버지의 일정에 따라 설거지하는 소리로 시끄러울까 봐 설거지는 뒤로 미루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며 다리를 펴고 쉬는 시간도 내가 피곤하거나 앉고 싶어서라기보다 잠을 자야 하는 시아버지에게 조용함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일어나 다시 출근하는 시아버지를 아침처럼 대문까지 배웅하고 들어와 하지 못했던 점심 설거지를 마치면 시어머니는 시장에 갈 준비를 했다.
당뇨와 혈압이 있어서 매일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하는 시어머니와 그 운동시간도 함께 해야 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 혼자 다녔는데 그 모습이 외로워 보여 한 번 따라가겠다고 나선 이후로는 그 역시 내 일과가 되었다.
시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자마자 새로 맞은 며느리냐, 보기 좋다, 예쁘다 등등 시어머니에게 던진 인사말이 듣기 좋았는지 매번 같이 가자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 함께 나서다 보니 이제는 마치 내가 볼 일이 있어 가는 것처럼 나의 일상이 되었다.
시장에서 사는 건 겨우 두부 한 모, 나물 한 종류, 호박이나 오이 등의 야채 한 가지, 생선 한 마리가 전부다.
생선과 두부는 늘 먹는 거여서 하루도 빠짐없이 사는 것 같다. 고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 시아버지의 소고기 안심이나 등심도 매일 사지만 늘 한 끼 분량이다.
그리고 똑같은 물건을 사러 매일 똑같은 집엘 갔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인절미도 사고,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순대도 샀다. 길거리 포장마차의 순대가 아니라 순대전문점에서 만드는 순대를 그 당시는 먹을 줄 몰라 매번 곤욕스러웠다. 영양이 많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이걸 왜 못 먹냐, 아무것도 안 들고 두부와 야채만 들었다는 등등의 설득이 있었지만 처음 먹는 사람에게 그 특유의 냄새를 표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순대를 잘 먹지만 그때는 그 순대를 정말 싫어했다.
얼마 전 '도시 촌놈'이라는 방송 프로에서도 그 순대를 소개하는 것을 보았는데 순대전문점이 서울에도 많지만 그 때 먹은 순대는 정말 흔한 순대는 아니다.
너무 오래 먹어보지 못해 또다시 잘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각자 좋아하는 것들을 사 가지고 와서 함께 앉아 먹는 시간들은 좋았다.
저녁을 준비해야 해서 그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들이 잠시나마 숨을 고르게 할 수 있었다.
곧이어 방금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온 것들로 저녁 준비를 하려면 역시나 바빴다.
그 사이 다시 한복으로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다듬고, 데치고, 또 시아버지의 식이요법으로, 시어머니의 식이요법으로 정상적인 시동생과 내 입맛에 맞춘 세 가지로 나누어서 밥상에 따로 내야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내 자유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있었던 일, 시장에서 있었던 일, 동네에서 있었던 일들과 함께 내가 하지 못해서, 혹은 먹지 못해서 있었던 해프닝을 가지고 시부모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해서 저녁시간에도 늘 함께 안방에서 같이 있다가 가정예배를 마치고 두 분이 잘 시간이 되어서야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고 2층의 내 방으로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저녁 뉴스까지 마치고나면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처음에는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가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찬송을 부를 때 시부모는 음정에 상관없이 낮게 웅얼거리기 때문에 음 이탈을 막기 위해서 내 목소리가 가장 커야 되고, 성경은 눈이 어둡다는 이유로 늘 내가 읽어야 하고, 기도는 시아버지가 시키는 사람이 해야 하기에 또 시키면 어쩌지 하며 마음을 졸여야 하니 어색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남편도 없으니 누구에게 불평을 할 수도,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그 모든 하루의 일과가 마치고 나면 2층으로 올라가 나만의 자유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씻고 자기 바빴다.
하루 종일 뺑뺑이 돌며 종종걸음 했던 모든 피로가 한복을 벗어내는 순간 한꺼번에 몰려와 졸음으로 이어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간을 아무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 일과는 내가 짠다.
밥을 하고 싶을 때 밥을 하고, 내가 주고 싶은 밥과 반찬들을 내 맘대로 만들어 식구들에게 주고, 먹기 싫으면 안 먹고, 먹고 싶으면 밥때에 상관없이 언제라도 먹을 수 있다. 물론 가족이 있으니 챙겨줘야 하는 시간이 있지만 설사 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어느덧 그런 시간들이 기억에도 가물거릴 정도로 먼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시가의 스케줄에 맞춰서 시간을 보내려는 며느리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나마 함께 부딪히며 보냈기에 지금의 관계들이 성립되지 않았을까 싶다. 시부모가 없어도 여전히 우리는 한 가족으로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부모가 현재 살아있어서 함께 하는 다른 가족들보다 더 자주 만나며 소통한다.
비록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분가하기 전까지 6개월 남짓 되지만 그 시간에 평생 줄 사랑을 시부모만의 사랑방식으로 표현하며 다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지 않는가. 받은 사람만이 줄줄 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듯이 오랜 시집살이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자신은 절대로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안 시킨다고 하지만 무의식 중에 배우고 익힌 것이 시집살이이기 때문에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자신도 며느리를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30년 가까이 살면서 어쩜 6개월 정도의 시간은 짧다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투자해서 남은 30여 년의 시간들이 평안했다면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가족이 되려고 서로가 노력하며 끌고 간 그 6개월가량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함께 하지 못해도 여전히 내 일과 속에 시부모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을 동서들과 함께 했다.
명절도 친정보다 시가를 먼저 챙기라 했고, 시가의 일정에 맞추어 움직여달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부딪히고 서로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친정에 가라고 해도 시가 대신인 우리 집으로 먼저 온다. 처음의 어색함이나 서먹함도 없다. 도리어 친정식구들보다 더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시가식구들이라고 한다. 서로 아이들의 옷을 나누고, 먹거리를 나누고, 힘든 부분들을 먼저 헤아리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요즘에 아이들이 왕큰엄마, 작은 작은 아빠라고 부르며 만나는 가족들을 쉽게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 작은집의 사촌형제들까지 합하면 6남매인데 이 모든 형제들이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함께 모여 축복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시부모가 없어도 우리는 갖고 있는데 그러나 보니 아이들이 큰 큰엄마, 작은 작은 아빠라고 부르는 유별난 호칭도 자주 듣게 된다.
이런 모습은 서로의 일과 속에 서로가 함께 스며들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내 생각과 내 일정만 주장한다면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커가는 우리의 아이들에 따라 또 다른 일상을 꿈꾸지만 어떤 일정이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상대방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눈치를 주거나 구속할 대상도 없이 내 일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데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시부모가 정해준 일과가 그리운 것은 아마도 그때의 그 시간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 하루의 일과를 스스로 정하며 또 다른 누군가의 일정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내 맘에 들던 들지 않던, 원하는 방향이던 아니던 우리는 함께 해야 한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친구, 상사, 동료를 새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