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제목: 신승훈 - '보이지 않는 사랑' 가사의 일부.
또 와야지. 물에 물 탄 듯 밍밍한 아이스 우롱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름 모를, 그러나 고가인 것은 분명한 스피커에서는 가사 없는 재즈 연주곡과 팝송이 뒤섞여 나오고 있었다. 음악은 쉽게 공간을 좌우한다. 사람들이 눈치를 채도, 그렇지 못할 때도. 나는 자주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배경음을 지워버리지만 때론 소음까지 배경음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매번 비슷한 정도로 시끄러운 공간을 찾다 보면, 정말로 웅성이는 목소리들까지 공간의 일부로 여기게 된다. 그 소란으로 내가 찾은 장소를 기억하게 된다. 그러니까, 소리는 공간을 구성한다.
좋은 음악이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공간들이 있다. 한껏 꾸민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동네에서 열리는 팝업 스토어나 수염 기른 사장님이 직접 콩을 볶는 카페(높은 확률로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기는 하다만). 그러나 수염 기른 카페 사장님들이 음악이며 공간, 책이나 영화에 대해 얼마나 멋진 취향을 가졌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분위기를 띄우는 음악들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만 먼지 낀 공간들이야말로 일상적인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늘 보호색을 띨 뿐이다. 그러나 좋은 음악이 새롭고 눈에 띄는 공간에만 존재할 거라는 인식은 그야말로 편견이 아니던가. 색바랜 마트의 매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필사적으로 가사를 외운 기억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혹은 수상한 7080 클럽 앞에서 아닌 척 노래 찾기 앱을 켠 적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부산에 위치한 한 LP 바의 기억이다. 부산국제영화제로 북적이던 기간이었고, 자리가 없어서 일행 다섯이 나란히 바 테이블에 앉았다. 피자에 하이볼을 마셨던 것 같다. 신청곡을 받는 곳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한 곡이 넘어갈 때마다 노래 분위기가 튀었다. 콜드플레이 다음에 에미넴은 좀, 어색하지 않나? 게다가 노래는 엘피가 아니고 유튜브 뮤직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해할 만했다. 술이 맛있었고, 영화제의 여파인지 가게는 이상하게 들떠있었으니까. 우리도 덩달아 <헤어질 결심>의 삽입곡인 정훈희의 ‘안개’를 신청했다. 신청곡을 들은 직원분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저희가 한국 가수는 잘 못 틀어드려서요. 김광석 LP는 있는데. 용기를 냈건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는가. 아, 네. 김이 샜다. 그 뒤로 별 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크게 감명을 받지도 실망하지도 않은 채 가게를 나섰나 보다.
그 가게의 취향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LP바인데 유튜브 뮤직이라니. ‘정훈희’는 안되고, ‘김광석’은 된다니. 사장님 앞에서 떠들 배짱도, 이유도 없었지만 퍽 실망스러웠다. 술이 맛있었던 술집에선 실망한 기억만이 남았다. 모든 마실 것이 밍밍한 카페는, 언제 가도 이어폰을 빼고 가만히 귀 기울이게 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때론 음식점의 음식 맛보다도 들려오는 노래의 연속성이 중요하다.
경험적으로, 가구 배치가 멋지지만 의자가 불편한 카페보단 떡이 불어 터진 떡볶이 노점의 음악이 나를 배불린다. 오랜 경험으로 계량 없이 능숙하게 떡볶이 양념을 하는 사장님들은 가게를 운영한 시간만큼이나 익은 음악 취향을 가지고 계시니까. 그건 손님들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가 없어서, 사장님 귀에 듣기 좋은 정도의 음량을 유지한다. 대로변의 소음과 적당히 섞여드는 90년대 노래들을 훔쳐 듣고 있자면 그 음악이 닿는 면적만큼의 온도가 달라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 정확히 그 떡볶이 노점이었다. 나와 와니는 찬바람 부는 어느 날 우연히 그 앞을 지났고, 그날도 흘러간 시대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노래더라? 뭐지? 이 노래 진짜 좋은데.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하지 않았지, 하지만 떠날 필요 없잖아…. 진짜 뭐더라! 이대로 흘려보내야 하나 싶었던 찰나에 손님과 대화를 나누던 사장님이 큰 소리로 외치셨다. “신승훈! 노래 너무 좋지?” 우리 대화를 들으셨는지, 우연히 마주본 손님과 노래 얘길 하고 계셨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아마 후자였겠지만,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들으며 매번 그 떡볶이집을 생각한다. 그러면 멀어지던 음악 소리가 떠오르고, 마침내 기억해 낸 제목을 되새기고, 평소 알던 공간이 낯설고도 반가웠던 기억이 선명해진다. 글쎄, 말로 하기는 어렵지만 그 뒤로 신승훈의 노래를 더 찾아 듣게 됐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요즘은 공연히 따라 부르기도 한다. 어제는 사랑을, 오늘은 이별을…. 때로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어떤 음악을 (주워) 들었는지로 결정되는 것 같다. 소리는 음의 높낮이나 구체적인 가사가 사라지더라도 보이지 않는 형태로 오래 남아 기억을 이룬다. 일터에 신승훈 노래를 틀어두신 그 사장님이나, 노래를 정성스레 담은 티가 나는 카페들을 보면 분명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녕하세요, 준하입니다. 오늘은 어쩐지, 식사보다는 음악에 집중한 글이 되었네요. 식사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음식점이나 카페의 경험은 많은 경우에 음악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니까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번 두 편은 어떻게 보셨나요? 이번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험에 기반합니다. 언급된 LP바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밝히며, 해당 부분은 당시 함께 있었던 와니의 검증을 받아 작성된 글이라는 사실 역시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변명이 길었네요. 다음 주부터는 일요일 아침 식사에 관한 글이 두 편 업로드 됩니다. 일요일 아침의 식사는 지루하고도 특별한 것이죠... 여러분께는 어릴 적 꿈꾸던 완벽한 일요일 아침 식사가 있는지요? 저는 아주 오래 이 문제에 골몰했답니다... 농담이지만, 즐거운 상상임은 틀림 없죠. 그럼, 다음 주에 와니의 글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