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식사 - 소중한 사랑은 떠난 후에야

아가씨의 식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by 와니와 준하

안녕하세요, 와니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주제는 <식사와 배경음악>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식사보다는 식사가 이뤄지는 공간에서 듣게 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 처음 가는 식당에서 기가 막히게 제가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곧바로 그곳에 정을 주게 됩니다. 다리가 아플 때 100%의 확률로 좋은 음악이 나오는 카페가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지기도 하지요. 여러분도 그런 공간 한 곳쯤 마음에 품고 계신가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몇 시간이고 소리를 먹으며 보내고 싶은 곳 말이에요.

제목: 신승훈 - ‘처음 그 느낌처럼’


산책을 나가거나 집안일을 할 때, 음악을 듣지 않으면 일본 뮤지션 호시노 겐이 새벽 시간에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다시 듣기로 듣는다. 그는 자주 팬들이 보내는 신곡에 대한 질문에 매우 진중한 태도로 긴 답변을 하는데, 그러다 종종 자신의 음악이 가스펠에서, 재즈에서, 소울 음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이나 발을 잠깐 멈추고 먼 곳을 보며 그를 부러워한다. 그처럼 열성적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것도 음악을 만들 줄 아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듣고 자라온 것도 나의 몸을 이루는 것이라 그가 자신 있게 말하고 증명할 때마다 나도 내 듣기의 역사를 둘둘 말려있는 형태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꼴로 풀어내고 싶어 진다.


그러나 먹은 음식이나 읽은 책이나 보고 나서 지루해하지 않았던 영화의 목록을 확인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음에도, 듣기의 목록은 도무지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먹기나 읽기가 어쩔 수 없이 능동적 행위인 것과 다르게 듣기, 그리고 음악 듣기는 어떤 순간(예를 들면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처음으로 샀을 때나 스트리밍 앱에서 뭔가 찾기를 바라며 아무 곡이나 재생하고 다닐 때)에는 자의적 행위이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타의에 따른 행위가 되기도 한다. 소리나 음악이 내 의사결정 범위 너머에서 들려온다면 말이다. 곤란한 상황은 내가 손을 대지 않으면 식어버릴 식사를 앞에 두고 벌어진다. 비자발적 듣기가 심기를 거스르게 되면, 음식 앞에서 집중을 하지 못해 한 숟가락을 뜨다 말고 휴대전화를 꺼내 음악 검색을 시도하거나, (최근에는 신승훈의 ‘처음 그 느낌처럼’을 듣고 제목을 알고 싶어서 샤잠 앱을 켜려고 버둥거렸다) 아니면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음악의 맛없음! 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가게 주인에게는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지만, 동행자에게는 매번 식사 중 들리는 배경음악에 관해 칭찬을 하거나 불평을 한다.


어떤 식사 자리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유도 꽤 분명해진다. 집 근처의 특제 라면 레시피가 맛있는 만화 카페는 한결같이 일본 인디 뮤지션의 잔잔한 음악이 나와서 귀가 편하고, 처음 갔던 돈가스를 파는 식당에서는 인테리어와도 메뉴와도 조화를 이루지 않는 약간 오래된 아이돌 음악이 나와서 당황스러웠고, 지금은 사라진 학교 앞의 오래된 바에서는 중후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제목을 알고 싶어지는 새로운 음악이 나와서 찾아갈 때마다 귀가 바빠졌다. 사람마다 소리를 받아들이는 감각도 음악 취향도 다르고 도저히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조금은 내가 편하게 느끼는 음악이 어디에서나 틀어두기 좋은 음악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욕망이 항상 자리하고 있다. 음식에 대해서는 쉽사리 불평하지 않게 되는데도 배경음악 같은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니, 아무튼 까다로운 손님이지 싶다.


하지만 무엇을 먹느냐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듣느냐 또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굵직한 음악 장르들의 이름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많은 이들이 십 대 때 사랑했던 앨범들을 평생에 걸쳐 듣고 또 듣게 되는 것일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데서나 무심코 들어버린 배경음을 도무지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소리는 벽과 벽 사이의 공기를 채우고, 그 사이에서 특유의 울림으로 막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으려는 사람이나 식은 커피를 찻잔 안에서 돌돌 돌리며 따분해하는 사람 안으로 흡수되어 그 사람의 앞으로와 함께할 것이다. 어떤 음악은 제목과 만든 이의 이름이 분명히 발견된 채로.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채로. 손님들을 말도 못 하게 하는 가게에서는 불편한 침묵과 직원들이 산통을 깨며 수군대는 소리가 그곳의 공기가 될 것이고, 음악의 음역대도 시기도 박자도 거듭 바뀌는 곳에서는 대화하는 목소리들도 높았다 낮았다 하고, 어떤 잊힌 옛 노래를 트는 카페에서는 커피에서도 신중함의 냄새가 날 것이고, 어떤 술집에서는 과포화된 사람들 각자의 독백이 쌓여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좋은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찾아낸 사람처럼 다른 소리들 사이에서 마음을 흔드는 단 하나의 음악을 찾아내서 나중에 또 들을 수 있게, 다른 곡들과 섞어 늘어놓아 볼 수 있게 꼭 저장해 놓을 것이다.


제목을 알지 못한 흘러간 음악들, 신경을 긁지 못해서 지나간 노래들은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다시는 내 곁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며 돌아오더라도 나는 그 곡을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소리건 어떤 말이건 하나의 공간 안에서 우리가 주고받은 것들은 늘 공간 사이에 있었고 그 시공의 감각은 늘 붙잡을 수 있다. 감각은 결국 늘 공간과 함께한다. 집에서 씻지도 못한 채로 먹는 아침밥의 맛이나 전혀 밥 먹기에 적합한 곳이 아닌 곳에서 먹는 점심 메뉴의 서글픔이나 사람들을 초대해 대접하려고 고심해서 고른 잼의 종류처럼. 어딘가에서 이루어지고 기억하든 그렇지 못하든 물리적으로 나의 신체를 구성한 식사들처럼 어떤 음악들, 샌드위치나 애프터눈 티세트나 쌀국수를 먹으며 들은 음악들이 그 음식들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내 몸의 역사를 구성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랑하는 노래들의 목록만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런 곡의 제목들의 목록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찾으면 찾을수록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므로 전혀 의미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그러다 보면 역시 굳게 믿게 된다. 흘러서 끝나 버릴, 영원히 제목을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 음악들을 발견하는 날들이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을 참아 가며 재빨리 음식을 삼키는 날들보다 많았으면 좋겠다고… 영양 성분이 적절히 배분된 도시락만 사 먹고 싶은 사람처럼 되뇌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