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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님 Jan 21. 2020

시대의 행간을 읽는 법

이외수의 '단풍' 논란을 두고 

 “단풍. 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 의 절대로 거들떠보지 말아라. 저 년은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심해라. 저 년이 떠난 뒤에는 이내 겨울이 닥칠 것이고 날이면 날마다 너만 외로움에 절어서 술독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난 2018년 10월 10일 작가 이외수 씨가 개인 SNS에 올린 단풍을 두고 쓴 시이다. 단풍의 아름다움을 비유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멸칭인 ‘년’, ‘화냥기’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 글은 단숨에 화젯거리가 되었다. 논란이 불거지자 그는 “제 글 ‘단풍’에 쓰인 ‘화냥기’는 비극적이면서도 처절한 단풍의 아픔까지 표현하려는 의도였다”며 “여성을 비하할 의도나 남성 우월을 표출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그의 여성 혐오적인 글에 불쾌함을 느낀 사람들의 비판이 계속되자 이를 두고 작가 본인과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며 사람들의 비판에 반박했다. 



  ‘화냥기’는 ‘남자를 밝히는 여자의 바람기’라는 뜻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속되게 표현하는 여성 혐오 용어이다. 또한 문학에서의 여성 혐오는 이러한 멸칭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문학에서 드러나는 여성 혐오의 유형으로는 여성비하,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 강화, 가부장적 제도에 입각한 여성에 대한 차별, 여성의 도구화, 주변화가 있다. 이외수 씨의 글에서는 여성비하 표현과 더불어 철저히 가부장적 남성 자아의 화자를 불러와 여성을 왜곡되게 그려내면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했다. 이렇듯이 그의 글에 여성 혐오가 존재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백한 여성 혐오를 두고 문인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문학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그저 아무렇게나 하고픈 말을 쓰는 것이라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닌 ‘표현의 방종’이다. 예술의 절대적 자유인 마냥 여성 혐오표현을 당연하듯 사용해온 문학예술계의 행태와 이번 이슈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논리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혐오가 정당화되어왔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학작품, 예술, 미디어와 대중매체에서의 여성 혐오는 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성적 차이’가 표상되는 방식, 즉 재현되고 소비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적 구성주의에 의하면, 작품과 매체에서 그려지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사회에 실재하는 여성들을 왜곡함으로써 여성 혐오를 지속시킨다. 재현의 영역인 문학, 미디어 영역에서는 여성의 이미지를 왜곡되게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차이를 생산하고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재현이 기존의 남성 중심의 젠더 권력과 여성 혐오를 반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를 재구성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현되는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우리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로 기능하며 남성의 젠더 권력을 더 강하게 하며, 사회 전반에 여성 혐오를 공고히 해왔다. (월터스, 1999)


  한편에서는 예술작품과 대중매체의 여성 혐오에 대한 비판을 두고 여성 혐오 표현이 악의적으로 쓰이지 않았음에도 지나치게 검열하고, 마치 범죄처럼 몰아가는 것은 심한 ‘딴지걸기’라며 ‘예민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여성 혐오는 단순히 개개인의 감정이나 의도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와 권력의 문제이며, 문화적으로 누적된 습성의 문제이다. 창작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습적인 표현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여성 혐오이다. 오히려 혐오에 대한 인식 없이 관습적으로 사용해왔다는 것이 구조적으로 뿌리 깊은 여성 혐오가 만연했음을, 그리고 사회가 얼마나 혐오에 무뎌왔는지를 방증한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는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여기저기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젠더 권력을 가진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규정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와 불평등을 묵인하지도 않는다. 문학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 혐오를 자유롭게, 관습적으로 그려내고도 그것들이 떳떳하게 문학의 이름을 가지던 그때는 사라졌다. 여성 혐오를 내포하는 젠더 고정관념에서 비롯한 표현들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던 그때는 이제 지나갔다. ‘표현의 자유’, ‘예술의 절대적 자유’라는 명분으로 여성 혐오를 정당화하려던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논란이 일고 난 이틀 뒤,  이외수 씨는 본인의 SNS에 새로운 입장문을 올렸다. "독서량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난독증이 심하며, 난독증이 심한 사람일수록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거나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 또 그를 옹호하는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 문학인이 버려야 할 말이 많아진 세상이 참 무섭긴 하네만. ” 이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변화하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도태되고 있는 스스로이다. 사람들이 ‘난독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외수 작가야 말로 ‘젠더 무 감성증’에 걸린 것이다.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라며 사람들을 비난한 이외수 작가, 그야말로 ‘시대의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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