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포대와 맞바꾼 '가난'이라는 사진 한 장

쓸모를 다한 우리의 정착지. 07

by 길건너목련


"집에 어른 안 계셔?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거기 그대로 서 있어 봐. 아저씨가 딱 사진 한 장만 찍고 갈게."

열 살 즈음으로 기억한다.


난 그 무렵 요즘 사람들은 말해도 모를 슬레이트 지붕의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 딱 세 명이 사는 우리 집에 어른은 오로지 엄마뿐이었다. 그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던 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파출부 일을 하러 가고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오빠는 학교에 있었다.


난 여느 때처럼 이웃집 친구와 놀고 있었다. 다 떨어진 내복 바람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방문객, 그들은 발 디딜 틈도 없는 단칸방 안으로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날 때 덩그러니 두고 간 20킬로짜리 쌀 포대 하나.



사실 그들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 우리 집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우리 세 식구가 사는 단칸방을 힐끗 훑어보고는 내복 바람으로 서 있는 나와 우리 집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내 친구의 사진을 한 장 찍어갔을 뿐이었다.


(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괜스레 그때 같이 사진이 찍힌 친구 은영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때 그들이 찍어간 그 사진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무례한 호의만큼은 나의 기억 속에 여전히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너무 어렸던 탓에 그들의 소속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나왔겠거니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엄마, 우리 이 쌀 다시 그 사람들한테 가져다주면 안 돼?"

그리고 그날 아무것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내가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지만 난 그 순간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내게 무례하기 짝이 없었고, 난 분명 그 무례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왜 그날의 수치심은 여전히 내 것으로 남아있는가?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 이후 그 쌀을 엄마가 어떻게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그 사람들을 찾아가 화를 내고 따지기나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팔순이 훌쩍 넘은 엄마의 기억 속에 이 일은 이미 흔적조차 없을지 모른다.


아주 높은 확률로 나와 우리 가족의 피와 살이 되었을 그날의 그 '쌀'은 그렇게 우리에게서 흐릿하게 지워졌다. 내 마음속 한편에 선명한 수치심으로 남은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렇게 쌀포대 하나로 시작된 무례한 선행, 물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배부른 소리 말라고'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남편 없이 파출부 일을 하며 돼지처럼 잘 먹어대는 남매를 키워내야 했던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말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시작한 나 역시도 그들의 무례한 선행을 비난하기 위해 20kg짜리 쌀 포대를 꺼낸 것은 아니다.


가난, 사실 나는 이 가난을 설명하기 위해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옛이야기를 굳이 꺼낸 것이다.


힘겹게 브런치 고시에 붙고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의 가장 큰 난관은 '나는 과연 무슨 글을 쓰려고 하는가'였다. 몇 번이고 큰 마음먹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시도해 봤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다가 지우고.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놓게 되었다.


(내가 브런치 고시에 얼마나 힘들게 붙었는데! 이조차 가물가물하지만 5번은 떨어진 듯하다. 물론 넘을 수도 있다. )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빼놓고는 '나'라는 존재를 한 줄도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록 그 가난이 사람을 이토록 비루하고 초라하게 만들지라도 말이다.


물론 흔히 미디어가 그러하듯 가난을 좀 더 상냥하게 포장할 수도 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떨어지는 경쾌한 빗줄기 소리, 연탄 불에 올려 둔 커다란 들통에서 엄마가 꺼내주던 따스한 우유의 고소함, 조금도 러블리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러블리한 듯 보이는 가난 정도는 마음만 먹는다면 사실 얼마든지 써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 난 가난의 흉폭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좁은 집은 여름이 되면 불지옥으로 변한다. (온실처럼 변한다고 러프하게 표현해 볼까 하는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적합하지 않다) 우리 방을 따스하게 데어줬던 연탄의 추억 역시 마찬가지다. 고소한 우유 냄새의 기억보다는 연탄가스 때문에 쓰러져 좁은 방구석에 쏟아냈던 내 토사물의 냄새가 더 진하고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다. 가난에는 정취가 없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부끄럽지만 '가난'을 빼고는 단 한 줄도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이야기를 이제는 제대로 써 보겠다고.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용기가 생긴다. 사실 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이 가난 배틀은 꽤 자신이 있다.




새벽 첫 차 운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쌀포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가난 배틀이라면 우리 남편도 꽤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너 내가 화장실도 없는 무허가 집에 살다가 불나서 죽을 뻔 한 이야기했던가? 너 옛날에는 화장실 없는 집이 있었던 것도 모르지?"

우라질! 평소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부부인데, 박복한 건 어쩜 이리 똑같은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더는 무례한 선행을 베풀려는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대신 우리 시어머니가 매년 쌀을 보내주신다.


못난 자식들이 혹시라도 굶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