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다한 우리의 정착지_ 06
급식실에 근무하는 조리실무사들은 대부분 방학에 일하지 않는다. (제주도는 상시 근무로 전환했다고 함) 대신 며칠 되진 않지만 방학 중에 청소 기간이 있다.
식판과 기물들을 모두 삶고 세척하고, 후드 청소부터 시작해서 바닥 청소, 냉장고 청소, 아이들이 급식을 먹는 식당 창문과 책걸상 닦기, 그간 사용했던 물건들을 바꾸고 새 물건으로 교체하는 간단한 일까지 전부 그 기간 내에 해야만 한다.
급식실 일 자체 강도 덕분에 노동은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는 편이지만 방학에 쉬고 있다가 갑자기 일을 하려면 여간 고된 게 아니다.
오랜만에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나 겨우 이틀 일했어!"
!
"그런데?"
"아파, 그것도 많이 아파! 방학 동안 하나도 안 아팠던 허리가 벌써 아파!"
물론 20년이 넘게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버스 운전대를 잡고 고전하는 남편에게 할 투정은 아니었다. 겨울 감차로 인해 한 달의 반을 거의 놀다시피 했는데도 남편은 살이 급격하게 빠질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힘들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지만.
"오랜만에 일하려면 더 힘들지. 고생했어."
그런 남편이 선선히 내 노고를 인정하고 수고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죄 많은 남편이지만 난 이럴 때 고마움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힘든 상황에 놓여있으면서 그냥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투정마저 그대로 품어 준다.
난 그 점이 언제나 참 고맙다.
며칠 전 일이었다.
"XX 언니 남편은 전구도 못 갈아 끼운대. 수도꼭지는커녕 깜빡이는 전구도 전부 언니가 알아서 해야 한다던데."
평소 남편은 간단한 집안일 전부를 혼자 해결해 왔다. 가구 조립, 수전 교체, 전등 교체 등등 내 기준에서 남편은 못 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못 하는 사람 많아."
나는 의아했다. 결혼 이후 그런 일들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전부 다 하잖아?"
남편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처음에는 하나도 할 줄 몰랐어.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찾아보면서 하기 시작한 거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안방에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왔는데 집에는 젖먹이였던 아들과 나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두꺼운 책을 바퀴벌레를 향해 내던졌다.
즉사!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지금도 벌레를 싫어하지만 그때는 더 겁이 많았던 터라 도저히 영면에 든 바퀴벌레의 시체를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난 아들을 품에 안고 당시 방 노릇을 간신히 하고 있던 작은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덕분에 힘들게 일하고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온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커다란 바퀴벌레의 시체를 수습해야만 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늘 남편이 있으니 정말 하기 싫다 싶은 일들 앞에서 난 대충 뭉개며 시간을 벌면 되었다.
사실 난 그때 알고 있었다. 남편이 나 만큼이나 벌레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공포는 전염된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벌레를 보는 남편의 표정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다. 남편의 얼굴에도 벌레를 만지고 싶지 않은 께름칙함이 언제나 존재했다.
그래도 집안일은 정말 좋아서 하는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고 공구를 사 들이고, 아무리 집에 늦게 들어와도 깜빡이는 전등을 교체했으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전을 수리했다.
난 당연히 남편이 손재주가 많고 그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덩치는 소만 한데 바퀴벌레 하나도 잡지 못하는 아내 대신 벌레를 잡아줄 때처럼, 남편이 그저 애를 쓰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난 늘 내가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상대도 뭐 어느 정도까지는 참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함께 25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언젠가 남편과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사실 동물을 무서워한다. (오랫동안 개를 키우기까지 했는데 여전히 동물을 무서워한다)
한적한 오후, 우리 부부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멀리서 웰시코기 한 마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웰시코기는 보기보다 체구가 큰 편이다. 다리가 짧아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중형견 수준의 사이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멀찍이 있던 웰시코기는 자꾸만 가까워지고 있었다.
'쟤 지금 우리한테 오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남의 집 웰시코기가 미친 듯이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더니 갑자기 내 품에 안겼다. 그랬다. 빠르게 가까워지던 웰시코기는 주인이 끈을 놓친 사이 발랄하게도 모르는 나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물론 이유는 알 수 없다.
놓친 개의 견주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가와 사과할 때까지도 솔직히 나는 몰랐다.
"죄송해요, 저희가 줄을 놓치는 바람에. 어우. 너무 놀라셨죠? 얘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요."
"괜찮아요. 저도 개 좋아해요. 애가 성격이 진짜 좋네요."
나는 견주와 대화를 나눌 때쯤에야 깨달았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내 남편이 거의 3미터는 멀어진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그랬다. 남편은 달려오는 웰시코기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혼자 도망친 것이었다.
발랄한 웰시코기와 견주가 떠나고 나서야 돌아온 남편에게 물었다.
"지금 나 두고 도망친 거야?"
물론 남편은 부인했다.
"도망은 무슨, 개가 다가오길래 그냥 저쪽으로 살짝 피한 거지. 그리고 넌 개 좋아하잖아."
변명이 참으로 변변치 않았다. 난 남편을 보며 말했다.
"나를 향해 달려온 게 멧돼지였어도 그랬겠지. 난 동물을 좋아하니까!"
사실 남편은 믿음직한 구석이 조금도 없는 남자다. 하지만 난 모든 걸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믿고 의지할 수는 없는 남편이지만 25년이라는 세월을 나와 함께 견디어 온 사람이 아닌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결혼이라는 걸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힘든 시간을 꿋꿋이 함께 견뎌준 유일한 사람. 그거면 되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버팀목이 될 재목이 되지 않는 남편이면 어떠한가, 끝까지 내 옆에서 이 시린 세월을 함께 버텨내 주기만 한다면 말이.
"길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당신은 그냥 혼자 도망쳐,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차피 난 동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