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사람은 제 서러움에 겨워 우는 법이라고

쓸모를 다한 우리의 정착지_05

by 길건너목련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 난 남대문 상가에서 일을 했는데, 거기에서 일하던 언니가 해줬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어대니까 상갓집에 온 사람들이 전부 물어봤었대. 혹시 쟤 밖에서 낳아온 딸이 아니냐고."

당시 난 눈물이 많은 그 언니의 이야기가 재미있기만 했다.


"언니, 왜 죄 없는 친구 아버지 장례식에 가서 풍파를 일으키고 그래요."

세상천지에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무리 그래도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 딸 친구의 모습은 분명 과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을 들었다.


사람은 원래 제 설움에 겨워 울기 마련이라고!


그랬다. 친구 아버지의 죽음이 슬픈 것도 사실이었겠지만 당시 언니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 서러웠던 것이다. 장례식 장, 공식적으로 누구나 슬퍼해도 좋다는 허락이 깔린 판이었다.


그러니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울어나 보라고.


솔직히 말해서 지긋한 나이에 엉엉 소리를 내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혼자 집에 있을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가슴을 뜯으며 우는 것도 좀 처량하지 않은가.


'어른'이라는 가면을 내려놓고, 내 안의 설음만을 고스란히 내어놓은 채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기에 사실 장례식 만한 곳이 없다.


옛날 그 언니가 지금의 네 나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갔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눈물이 많았던 그 언니가 새해를 맞아, 남 부럽지 않을 만큼 많은 복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건 그렇고 이번 설날의 일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무섭게 간소해진 차례를 현충원에서 마친 직후였다.


차 뒷자리에 나와 함께 타고 가던 어머니가 작은집은 물론 친척들에게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간간히 추임새를 넣을 뿐이었다.


"다들 사는 게 힘들고 바빠서 그렇죠.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옛날 같았으면 전날 아침부터 시댁에 와서 하루 종일 만두를 빚고, 전을 부쳤을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새벽같이 현충원에 가서 배 하나 사과 하나를 놓고 차례를 지내면 끝이다.


결혼한 지 25년이 넘어 광명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광명만으로도 모자라 작은 아버님과 남편은 굳이 바쁜 명절 당일에 찾아올 것 없이 설 전에 시간을 맞춰 낮에 차례를 지내자고까지 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기적 같은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젠 명절 새벽에 일어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종교도 없는데 '할렐루야' 소리야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평생 일 년에 열 번도 넘던 제사에 치이며 살았던 장손 맏며느리였던 어머니 역시 나처럼 기뻐하실 줄 알았다. 요즘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 제사며 차례며 모두 어머님이 손수 나서서 축소하신 판국이라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서러움을 토로하셨다.


"다들 그러는 거 아니야. 그동안 내가 자기들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나 먹고 살 거 없어도 작은 집이고 어디고 내가 먼저 전부 챙겨주고 살았어.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다들."

그제야 깨달았다.


평소와 조금은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머니는 제일 먼저 친한 이웃집 아주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은 어머니가 아프실 때 돈도 들고 오고, 먹을 것도 챙겨 오고 하는 지인 분 중 한 명이었다.


그분 역시 어머니가 5년 전 아버님을 잃은 것처럼 몇 해 전 먼저 남편을 떠나보낸 분이셨다.


"세상에, 시댁 식구들이 아무도 안 오드란다, 남편 죽었다고! 명절에 찾아오지도 않더래........ 남편 살아있을 적에는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서 먹고 마시고 그러든 사람들이. 이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란다. 어제 통화를 하는데 그이가 얼마나 우는지, 내가 아주 안쓰러워서 혼났어. 진짜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그랬지만 그이도 시댁 식구들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솔직히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저절로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드리웠다. 그러니까 지금 어머님 말씀은 주야장천 집에 와서 밥 먹고 술 마시던 시댁 식구들이 남편 죽고 나서 안 온다고 서럽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쎄가 빠지게 음식을 만들 일도 없고, 피 한 방울 하나 안 섞인 남의 식구들 챙길 일도 없다는 건 무조건 행복한 일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즈음 어머님이 눈물을 떨어트리셨다.


"다들 그러는 거 아니야, 진짜."


이웃집 여인의 설움을 제 설음과 섞어 토해내시던 어머님은 그 말을 무척이나 많이 반복하셨다.


나는 거기에 대고 '어머님, 이제 다시 만둣집 아저씨처럼 만두를 빚을 일도 없고, 광장 시장 아줌마처럼 전을 부칠 일도 없어요. 이제 해피해질 타이밍이라고요.' 소리칠 자신은 없었다.


그냥 어머님의 아들들이 하는 대로 나 역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난 집에 도착해 따끈한 만둣국이 놓인 상을 차리며 깨달았다. 이웃집 아주머니와 어머니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왁자지껄한 명절 분위기에 휩쓸렸던 생기 넘치는 그 시절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랬다. 커다란 상에 놓인 만둣국은 겨우 네 개였다.


어머님이 손수 만든 갈비와 잡채로 풍성하게 차려진 밥상 위에는 우리 부부와 삼촌, 그리고 어머님의 만둣국 네 그룻이 전부였다. 넓은 상 두 개로도 모자라 앉을 데가 없어서 몇 명은 주방 식탁에서 밥을 먹어야만 했던 옛 풍경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물론 그건 아버님이 돌아가신 탓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또 누군가는 머리가 굵은 어른이 된 탓에 공사다망하다. 또 누군가는 늙고 병들어 더는 이런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뿐이다.


하지만 어머님의 서러움은 그렇게 가슴속 아픔으로 커다랗게 자리 잡았다. 남편을 잃었다는 이유로 내가 무시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갈비도 먹어, 이것도 좀 먹어보고."


덕분에 나는 어머니의 밥상머리 권유를 평소처럼 모른 척하지 못했다. 잡채도, 갈비도 말 그대로 돼지처럼 먹었다.


나라도 잘 먹으면 어머님의 기분이 조금은 좋아지시지 않을까 싶어서.


어머님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상을 물리고 과일까지 깎으셨다. 예전 같으면 '전 안 먹어요'라며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이번에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던 어머님이 무척 쓸쓸해 보인 탓이었다.


현충원에서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고, 과일까지 먹었는데 아침 8시였다.


그렇게 나는 설날 아침부터 부른 배를 움켜쥔 미련한 돼지가 되어있었다. 안 그래도 이미 충분히 뚱뚱한데 말이다.


"어머님이 우시는 바람에 일부러 엄청 열심히 먹었어. 나 진짜 배불러 죽겠어."


집으로 오는 길 남편한테 하소연을 했다.


"잘했어."


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편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런데 넌 어머님이 먹으라고 그렇게 권하는데도 사과 한쪽을 안 집어 먹더라.'


아들자식 낳아봐야 아무 소용없다, 진짜.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아들이나 어머님이 낳아주신 남의 아들이나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물론 아무 때나 쏟아져 나오는 어머님의 서러움 역시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본디 사람은 제 서러움에 우는 법이고, 사람의 헛헛한 마음은 쉬이 채워지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우리 어머님에게는 이 나이 먹도록 과일도 제대로 못 깎지만 이럴 때 휴지를 건네주는 무정한 며느리 하나가 있으니 말이다.



어머님은 집으로 가는 우리 손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것저것 원 없이 챙겨주셨다. 우리 어머님은 언제나 베푸는 쪽이다. 그런데 세상 이치라는 게 무척이나 얄궂다.


안타깝게도 베푸는 쪽에는 늘 서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