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다한 우리의 정착지 _03
나 빼고 모두가 부자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잘 산다. 지금 일하는 곳도 그렇지만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도 그랬다. 나랑 같이 일하던 언니들은 내 기준에서 모두 부자였다. 꼭 신이 일부러 나만 따돌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내 기준이 문제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언니들이 힘든 일을 굳이 내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집, 차, 땅, 저축, 보험, 연금, 주식, 정말 나만 빼고 모두들 가지고 있다. 하물며 집은 한 채가 아닌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질투한다거나 미워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가끔은 너무 부러워서 종종 침을 질질 흘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건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 인간이기에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솔직히 그들을 부러워하는 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전부 갖고 싶다. 이왕이면 많이 갖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이 세상에 18억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소시민은 없어요, 언니!"
며칠 전 오전에 생긴 일이었다. 모두 일을 시작하기 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한 언니가 뉴스에 난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뉴스를 보지 않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골조는 이것이었다. 50대 신혼부부가 18억짜리 아파트를 샀는데, 규제 탓에 신혼부부 대출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대출 규제를 시작한 대통령을 상대로 고소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뉴스 내용은 내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불이익을 당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소송을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 것일 테고, 대출 규제라는 정치 이슈에 관해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 내가 빡친 부분은 대출 규제도, 소송도 아니었다.
단지 18억짜리 아파트와 어색하게 들러붙어 있는 '소시민'이라는 워딩 그 자체였다.
물론 따로 뉴스를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실제 워딩이 '소시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언니가 편의상 선택한 단어일 확률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 한 가지다.
'18억짜리 아파트를 사려고 했던'과 '소시민'이라는 단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언니가 뒤이어했던 말들 역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18억짜리 아파트를 사는 게 무슨 죄가 되겠는가. 요즘 아파트 값이 다 저렇다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루에 세 탕을 뛰며 힘들게 일해서 부자가 된 그 언니의 삶을 나 역시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고 있었으니 그 점에 대해서도 전혀 할 말이 없다.
'저런 피해자들이 생기는데 부동산을 잡는다고 무작정 저렇게 대출만 막아놓으면 어떻게 하냐?'
'요즘 아파트 값이 다 저렇다.'
'나도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지만 남들 쉴 때 하루 세 탕씩 일해서 힘겹게 번 돈으로 산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18억짜리 아파트를 사는 사람들은 절대 소시민이 아니다. 아니, 소시민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정치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의 문제도 아니다. 어쩌면 이건 사실 강퍅한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를 향한 '예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 대한민국에 18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들이 대체 몇 퍼센트나 되는지 알 지는 못하지만, 그 높다란 아파트 아래에도 사람이 산다.
그리고 그 아래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시민이라고 여기고 있다.
재벌이, 정치인이, 소위 '사'짜가 들어가는 거대 집단들이, 혹은 연예인이 '억억' 소리를 낼 때마다 뱃속이 찌르르 아파오는 진짜 소시민이 모두 거기에 있다.
그러니 '억'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그들이 제발 '소시민'이라는 우리의 타이틀까지 앗아가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우린 겨우 소시민이라는 타이틀 하나를 가졌다.
게다가 그 타이틀은 결코 명예롭지 않으며, 우리에게 하루에 100원의 이득도 주지 않는다. 애초에 빼앗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99개를 가진 놈이 1개 가진 놈의 것을 빼앗는 추악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런 것까지 빼앗으려 들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진짜 소시민들은 '소시민'이라는 타이틀을 원치 않는다. 모두 하나같이 언젠가 머리 위로 동아줄이 내려와 주기를,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다리가 부디 계층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소시민이라는 그 타이틀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반짝거리는 마천루를 목이 빠지게 올려다보며 살아가는 가여운 우리를 대체 앞으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지만 소시민은 내 타이틀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우리의 타이틀이다. 18억짜리 아파트를 감히 탐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것이 확실하다.'
이쯤 되니 정말 웃기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짜들은 소시민이라는 타이틀마저 빼앗고 싶어 난리고, 정작 진짜들은 '소시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현실이라니 말이다.
어쨌든 난 오늘도 로또를 살 생각이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그 결과에 마음이 쓰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