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가여워지기까지 자그마치 25년이 걸렸다

쓸모를 다한 우리의 정착지_09

by 길건너목련
"당신은 현빈도 아니고, 난 손예진도 아닌데 어떻게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겠어?"


이미 아름다운 외모가 전부가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험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험한 것'인 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우리 부부가 어떻게 결혼도 하고, 애까지 낳아 20년을 살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이건 한참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남대문으로 출근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남편은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고, 간혹 출근하는 나와 마주치는 날도 있었다. 내 출근 시간에 맞춰 술에 만취한 채 들어오는 남편을 바라봤던 그 시절 나의 눈빛에는 분명 증오와 혐오만이 깃들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분명 세상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남편을 미워했으니까.


그리고 그 시절 난 지금 내 나이였던 언니들에게 하소연했다.


"좋으시겠어요, 남편이 저렇게 다정하셔서. 우리 남편은 제가 출근할 때가 돼서야 들어와요. 술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혼자 살지. 왜 절 만났을까요?"


젊었던 난 남편 욕을 하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어쩌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상하긴, 안 그래. 우리 남편도 똑같았어. 남자들 젊을 때는 다 그래."


언니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난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시절 언니의 남편은 이른 새벽 매일 같이 아내의 출근을 도와 가게 문을 열고, 점포 정리까지 해 주고 출근하던 성실한 분이셨다.


그리고 언제나 세상 다정한 얼굴로 내게 인사까지 건네셨다.


"언니, 저렇게 좋은 남편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언니는 그때 격하게 소리치는 내 눈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OO아, 너도 나만큼 살다 보면 언젠가 그렇게나 미워했던 남편이 측은하고 안쓰러워 보이는 순간이 올 거야. 우리도 너랑 똑같은 시간을 보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봐. 언젠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물론 난 믿지 않았다. 그저 다정한 남편을 둔 그 언니가 부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난 언니의 말대로 내 남편이 안쓰럽다. 멀쩡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그것이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회사는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야. 그건 알고 있지? 그런데 그 안전망이 당신 목을 조르고 있다면 좋아. 당장 사표 써, 대신 기억해. 회사 밖이 지옥이라는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거, 그 정도 각오는 하고 나와."


저 가여운 사람이 그래도 살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1년 넘는 실직 생활 동안 남편은 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다. 원래 나이가 들면서 가사를 종종 도왔던 남편이었지만 이 정도로 전담하다시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버스운전을 시작하고 난 지금도 오전 타임일 때는 가사를 전담한다.


급식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할 일이 없다. 설거지는 물론 빨래,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까지 전부 해결되어 있다. 내 저녁밥만 챙겨 먹고 잠들면 될 정도다.


원래 장 보는 일은 남편이 전담하고 있었으니, 남편이 오전 타임일 때만큼은 가사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 기저귀를 갈아준 게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남편인데 말이다.


그래서였다. 과거 어떤 언니가 해줬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언니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언젠가 남편이 측은하고 가여워 보이는 순간이 올 거라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코를 골며 잠든 남편이 나는 무척이나 가엽다. 요즘 들어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파스를 붙여 달라고 요구하는 남편이 측은하다.


밉기만 했던 남편이 측은해 보이기까지 자그마치 25년이 걸린 것이다.


확실히 가성비가 떨어지는 짓이긴 하다. 결혼해서 25년을 견뎌야 상대방이 가엽고 측은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그제야 진심으로 잘해줄 마음이 생긴다니 말이다.


생각해 보자. 드라마 속 젊은 연인이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널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내 곁에서 25년만 견뎌주겠어? 그러니까 내 말은 네 눈에 내가 측은하고 가엽게 보일 때까지 가혹한 우리의 결혼 생활을 견뎌줄 수 있겠냐는 말이야."


너무 끔찍한 장면이 아닌가?


하지만 부부 사이의 정이라는 것은 속세의 로맨틱한 사랑과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반반 결혼이니 가성비 연애니 하는 것이 판치는 지금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말이다.




"나 이번 달에도 만근 못 채워."


"응?"


참고로 남편의 버스 회사 만근은 26일이다. 만근해야 간신히 세후 300을 손에 쥘 수 있다. 하지만 초보 버스기사는 만근 자체가 쉽지 않다. 한 달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26일 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이 없어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본사에서 감차하라고 했다더라고."


"그럼 앞으로도 만근 하기는 어렵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남편의 걱정이 한눈에 보였다. 1년을 백수 생활하며 논 것도 타격이었는데,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을 그마저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현실 앞에 놓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뭐. 이왕 그렇게 된 거. 편하게 쉬어. 저번주에는 하루도 못 쉬고 일했잖아? 과로로 죽는 거보다는 나아."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찌 됐든 목숨이 붙어있는 한 살아가야지.


"그렇겠지?"


"그럼, 그나저나 내가 우리 급식실에 고양이 들어왔었다는 이야기 했던가? 세상에 처음 보는 녀석이 들어왔어. 어찌나 큰지 아주 토실토실하더라고, 걔 쫓아내느라고 아침부터 난리였잖아."


"그랬어?"




확실히 사랑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난 비록 '험한 것'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젊고 잘생긴 남자가 좋다. 남편 역시 내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함부로 말은 못 하지만 날씬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성격도 판이하게 다른 탓에 부부라고는 하지만 둘 사이에 접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5년을 함께 살았다.


남편은 잘생기고 멋진 현빈일 리 없고, 매우 안타깝게도 난 아름다운 손예진이 아니다.


우린 함께 눈을 맞추며 사랑의 밀어를 나눈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서로의 외모에 매력을 느낀 적도 없다. 하지만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 사람들은 이런 부부 사이를 동료, 혹은 전우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물론 그 역시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정과도 다른 그 무언가, 부부 사이에는 분명 그런 찐득하고 애틋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25년을 살아내고도 아직도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 사이에 분명히 있다.


"당신 기억나, 옛날에 나 출근하는 시간에 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들어오고 그랬었잖아? 생전 애도 안 보고, 집안일에 관심도 없고, 전부 내가 다했어!"


하지만 난 지금도 가끔 남편을 다그친다.


"야, 넌 맥도널드에서 아이스크림 먹다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냐? 야, 그때는 나도 회사에서 버텨보려고 갖은 애를 쓰느라 그런 거야. 너 모르냐? 그때 우리 회사 사람들 매일 술 마시고, 또 마시고 난리였던 거. 진짜 회사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내가 그때 별 짓을 다 했어. 내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남편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 시절 남편은 친구들이랑도 겁나 마셔댔었다. 지금은 그저 늙고 병들어서 더 이상 그렇게 마실 수 없을 뿐이다.


'네 친구들이랑 퍼마신 것도 사회생활의 일환이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