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K Apr 21. 2022

기획서

기획서 작성은 AE가 보유해야 할 역량의 정점이다. 그만큼 쓰기가 어렵고 고통스럽다. 2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파워포인트이다. 안 그래도 쓸 말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상태인데, 그걸 텅 빈 파워포인트에 1페이지 씩 나눠서 정리하는 게 고역이다. 두 번째는 인간적 욕망이다. 하나의 얘기를 일관되게 얘기하는 게 가장 깔끔한데, 쓰다보면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콘텐츠가 또 나온다. 그런데 이번 과제에 담기엔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나를 둘 다 채택하게 이끈다. 그렇게 되면 이 얘기 하다가 저 얘기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렸을 땐 기획서 때문에 선배들이 참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현업들을 쳐내고 나니 회사 창 밖이 캄캄하다. 저녁식사를 하고 오면 새하얀 파워포인트 첫 장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사수가 기획서 작성을 담당하고, 나는 기획서 논리에 필요한 자료를 찾았다. 글이란 건 무엇이든 막힘없이 술술 흘러가는 경우는 없나보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사수가 타이핑 소리보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퉁퉁 튕기는 소리를 더 낸다. 그녀는 지금 번뇌하고 있다. 고통받고 있다. 난 뭐라도 찾는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그녀의 세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으니까. 긴 침묵 끝에 그녀가 한 마디 내뱉는다. 들어가렴. 고생했어.


나를 시험하거나 떠보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진심이라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사수보다 퇴근이 더 좋다. 못 이기는 척 가방을 챙겨 나온다. 다음날 아침, 오자마자 메일함을 확인한다. 새벽 5시 8분. 사수가 내게 보낸 메일이 와 있다. 첨부한 기획서로 팀장님과 상의해 달라는 당부. 사막에 혼자 던져진 사람처럼 두려움과 좌절감이 엄습한다. 그녀가 쓴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여러번의 망설임 끝에 팀장님 자리로 이동하려는 순간,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내가 말씀드릴게. 그 순간 그녀는 내 엄마이다.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팀장님, 사수와 함께 기획서 논의를 위한 미팅을 한다. 광고인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기획서 작성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반대급부로 아우라는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안 올줄 알았던 순번이 나에게도 왔다. 기획서를 도맡아야 하는 연차가 됐다. 항상 첫 파트가 가장 어렵다. 멋있는 말로 출발하면 부여 받은 과제와 거리가 먼 느낌이다. 반대로,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면 다음 얘기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기 어렵다. 초반 파트의 관건은 중간지점 찾기이다. 클라이언트의 관심사 안에 들어있되, 잘 알고 있지는 않은 그런 이야기. 산 넘어 산인 게, 초반 파트를 우여곡절 끝에 잘 정리하면 나중에는 매력적인 제목 찾는데 시간이 또 소요된다. 완벽으로 가는 길이다.


첫 파트에 이어 중간 파트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이다. 흔히 썰을 푼다고 표현한다.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책에 나오는 이론을 내세우는 건 지양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우리 회사의 주장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클라이언트의 제품을 써 보며 들었던 생각이나 조사한 결과 들을 종합해 글로 펼쳐내는 방법이 있다. 또는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다른 브랜드의 대처방안 등을 살펴보며 우리의 인사이트를 드러낼 수도 있다. 아니면, 순전히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집중해 이것이 시작된 배경, 만드는 과정을 조명하는 방법도 있겠다.


결론 파트에서는, 그래서 우리가 제안하는 전략이 뭔지 압축적이고 강렬하게 제안한다. 다만, 기획서에 이어 제시할 제작물보다 돋보이려는 욕심은 눌러둬야 한다. 제안 전반을 봤을 때 고점은 기획서가 아니라 제작물이다. 대중과 브랜드가 커뮤니케이션 하게 될 대상은 광고물이니까. 클라이언트가 제작물에 대한 충분한 기대를 품을 수 있도록 날카로우면서도 깊이있는 관점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해당 전략을 펼쳤을 때 얻을 수 있는 기대효과를 가시적으로 표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 선배의 말씀이 떠오른다. 가장 좋은 기획서는 뺄 게 없는 기획서이다. 상사에게 리뷰를 받을 때 이를 체감한다. 기획서를 페이지 별로 쭉 출력한 다음, 회의실 벽에다 붙인다. 전체 흐름을 기준으로, 각 페이지 별 역할에 대해 도전 받고 응전한다. 이 과정 속에 목적에 부합하는 페이지들만 살아남는다. 철저히 한 가지 목적만을 전달하기 위한 기획서가 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기획서가 매끈해진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고친다. 심지어는 프레젠테이션 대기실에서 고칠 때도 있다. 이 지난한 과정 속에 인생을 배운다. 내 뜻만큼 남의 뜻도 받아들일 때 모든 일이 잘 돌아가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광고회사 출신 클라이언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