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술관 :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웰컴 홈. 서동진, 리쾌대 그리고 삼성
수원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다른 약속도 있었지만, 대구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실 대구는 첫 방문이다. 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때 기차나 버스를 타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습관이 있다. 요즘 공부를 해도,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무언가 가슴이 답답하다. 그럴 때, 그림을 보고 화가와 캔버스 속 풍경과 인물들에 공감하는 작은 찰나에 해방감을 느낀다. 그 감정이 필요해서 대구로 떠났다.
미술계, 문화계를 넘어 한국 사회가 이건희 컬렉션 열풍에 빠져있다.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의 예술품 기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일단 각 지역에서 상징적인 화가들의 작품들은 대구, 광주, 양구 등 각 지자체 소재의 미술관에 일부 기증되었다. 나머지 예술품들을 어떻게, 어디에 전시할 것인가 아직도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올림픽을 방불케하는 유치전 속 일단 서울이 유력하다고 하나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 예약은 '광클', '1초컷'이라고 한다. 대구미술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운좋게 한 자리가 남게 되어 급하게 예약에 성공했다. 전시회의 이름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 웰컴 홈 - 향안>이고, 대구 연고의 서동진 / 서진달 / 이인성 / 이쾌대 / 변종하 / 김종영 / 문학진 / 유영국의 작품 20여 점에 기타 소장 및 대여 작품 20여 점을 더해 40여 점이 전시되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서동진의 소녀 초상화 두 점이었다. 먼저 '소녀 좌상'이다.
1923년 작의 수채화다. 이건희컬렉션은 아니고, 개인 소장작이다.
한복을 입은 소녀가 책을 들고 앉아있다. 뒷편 책상 위에는 책들이 올려져 있다. 옆의 장식장에는 작은 석고 조각상이, 밑에는 또다른 책들이 눕혀있다. 기품있어 보이는 방의 풍경이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여유있는 가정이었을 것이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소녀가 든 책은, 그리고 방 안의 책은 어떤 책들일까? 서구적인 석고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학문의 책들이 아니었을까?
작품을 보고 이미륵 작가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떠올랐다. 시골 서당 소년이었던 미륵은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새로운 세상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한복을 입고, 버선을 신고, 서당 대신 학교에 간 미륵과 책을 든 이 소녀의 표정을 비교해 본다. 그 시대에도 공부가 재밌는 학생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 지배가 한창이던 1920년대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경제, 사회, 문화의 혼란 속 조선의 전통은 급속히 무너져내렸다. 신학문이 서당을 대체하기 시작한 때도 이 시절이었을 것이다. 백색의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신학문을 공부하는 소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시절의 화가와 지금의 관객들을 또렷이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당돌함, 아니 당당함이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이 소녀의 미래는 어땠을까. 엄혹했던 시대를 넘은 신여성으로 성장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 그림 또한 서동진 화백이 그린, 소녀를 모델로 한 수채화다. 앞선 그림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소녀는 역시 한복을 입고 있지만, 바느질을 하고 있다. 배경은 평범하다. 작은 장롱 위에 꽃 한 송이가 전부다. 앞의 '소녀 좌상'과 다르게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수 놓는데 열중하고 있다. 소녀의 바느질은 삯바느질이었을까?
일제강점기의 '교육'이라 하면 극소수의 엘리트층의 전유물이었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밭일과 막일을 하러, 소녀들은 바느질과 집안일을 했다. 이 소녀 또한 바느질을 하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해방을 맞고, 전쟁통의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앞선 '소녀 좌상'의 연도가 1924년이고, 이 '수놓는 소녀상'의 연도가 1933년이다. 혹시라도 그 사이 훨씬 더 엄혹해진 식민 지배의 상황으로 교육조차 받기 어려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2021년, 나라의 혼란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동에 내몰리는 미얀마, 아프가니스탄의 소녀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과거는 우리의 할머니 세대이다. 소녀의 바느질이 참 예뻐서 뭔가 더 서글픈 그림이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그림은 이쾌대의 '항구'다. 항구 연작으로 유명한 호남의 오지호 화백과는 또다른 느낌의 항구다. 이쾌대는 시대를 부딪히며 살아간 화가다. 일본 땅의 한반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의 유학해 서양과 조선의 전통의 혼합을 고민했다. 전쟁과 남북의 사상 대립을 모두 맞딱뜨린 후 월북했다. 월북 이후 해금 전까지 언급조차 못 되었던 화가다.
짙은 붓 터치로 그린 해질 녘의 노을과 어선에서 리얼리즘이 느껴진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던 북한 미술 상황을 생각해보면 리얼리즘 그림에 천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이 항구를 보면 과연 한국 미술계의 거장임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그림보다도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이쾌대의 서명이다. 우측 하단에는 '리 쾌대'라고 적혀 있다. 이전의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그림들에는 'Qoede Lee' 등의 필체가 자유롭게 펼쳐져있다. 두음법칙을 지켜 리쾌대라고 정직하게 적힌 서명에서 이쾌대가 북한에서 이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시대의 혼란 속 예술가가 택한 운명이 그림의 디테일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대구미술관이 이건희컬렉션을 대구로 유치하기 위해 이 전시를 기획했음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전시회 입구에 삼성가와 대구의 인연을 강조하는 영상 비디오가 관람객의 이목을 끈다. '삼성은 대구 기업, 이건희 컬렉션은 대구로' 이런 느낌이다. 마침 전시회 출구에는 '이건희 컬렉션 대구 유치 시민 서명운동' 종이도 있다.
이건희컬렉션이 지방에 유치된다면 역시 연고가 있는 대도시인 대구, 혹은 경북 지역에 가는 게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큐레이팅의 주인공이 삼성과 이건희 회장으로 귀결되는 것은 자못 아쉬운 부분이다. 대구와 인연을 맺은 화가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으로, 뒷편에 놓인 느낌이었다.
전시장의 이건희 회장 영상을 보면, 삼성과 이 회장은 '민족 문화의 보존'을 위해 평생에 걸쳐 미술품을 수집하고 전시에 힘썼다고 한다. 컬렉터인 이건희 회장은 자기 자신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의 설립 장소보다, 대중들에게 덜 알려진 한국의 화가들을 더 주목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관람일 : 2021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