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몇 자루와 팔레트, 엽서 크기의 수채화 종이를 챙긴다. 정성 들여 밑그림을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물감을 찍어 물과 함께 섞어준다. 밑그림 위에 얇게 색을 올릴 찰나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으로부터 내 마음의 상태가 느껴진다.
색을 과하게 쓰면 내 마음에서부터 어떤 욕심이 올라오는 것이겠고 선이 깨끗하지 못하면 아직도 어지러웠던 주말 시간이 묻어 나오는 거다.
선과 풀어낸 색으로 단정하지 못한 마음의 어느 지점을 보기도 하고, 겨우 호흡이 정돈되어 색이 차분해지고 있구나 마음의 변화 정도를 체크하기도 한다.
숨을 고르고 붓의 떨림을 최소화해야 그림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처럼, 내 삶에서도 숨을 고르고 흔들림을 최소화해야 될 때가 있다. 그림은 어느덧 내 삶의 작은 호흡이 되었다. 꾸준히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져온 것이 벌써 3년이 되었고 나는 감히 이 시간을 “나만의 명상 같은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다.
솔직히 그림을 배워본 것이라고 해봐야 십수 년 전, 일 년 정도 취미 화실을 다닌 게 고작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림이 그리고 싶던 이유는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퍼부어 준 내 그림에 대한 칭찬 덕분이다. 막연한(?)이 "좋은 느낌"은 그 후 스스로 화실을 찾게 한 힘이었다.
화실 1년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실로 이제껏 느껴볼 수 없었던 그림 그리는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화실 문을 열자마자 콧속으로 훅 들어오던 잊지 못할 테레핀 린시드 오일 냄새, 스케치북에 사각사각 갈리던 연필 소리, 유통에 붓을 흔들어 씻을 때 나는 작은 개울물 소리, 캔버스에 물감이 발릴 때 그 미끄러짐, 휴식시간 뻣뻣한 뒷목을 만지며 믹스커피 한 잔 들고는 지긋이 내 그림을 바라보던 시간 하며 모든 생각으로부터의 절단을 꽤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몰입 등등 매료되지 않고는 못 배길 느낌들이1년 안에 차곡차곡 쌓였더랬다.
중학교 때 내 마음을 한껏 부풀리던 선생님 칭찬 한마디, 화실 1년 기억은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 육아에 지쳐하던 어느 날 문득 다시 내게 찾아왔다. 엄마들이 한 번쯤 겪을 만한 우울감이 점점 나를 짓누를 즈음 창고 한 켠 굳어가는 물감과 그림도구들을 꺼내 드는 것만 해도 내 마음에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는 아이, 놀아달라고 엄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 둘 속에서 제대로 된 그림 시간을 갖기란 하늘에 별따기쯤 되는 일이다. 물감을 접고 색연필로 꽃 한 송이 커피 잔 하나 그리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고 나는 동네 작은 책방을 열었다.
책방이니 당연히 책모임을 제일 먼저 열었지만 무엇보다 책방 프로그램에 넣고 싶었던 것이 그림 그리는 모임이었다. 내가 맛 본 몰입의 세계, 아주 미세한 떨림의 순간을 바라보게 하는 힘... 그 매력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우리 책방 그림 모임에는 그림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없다. 그려보고 싶은 사진이나 그림을 골라 따라 그리거나 새롭게 그리면 된다.
고요히 “그림과 나”만 남아지는 시간으로 꾸려진다.
목적이 내 마음을 보는 것이면 되고 생각을 잠시 멈추어 호흡을 가다듬으면 되기에 잘 그려야 할 필요 없고 타인의 그림과 견 줄 필요도 없다.
입시미술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공모전에 낼 그림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말과 글처럼 또 하나의 수단.
내 마음을 내어놓는 일에 기술이 필요할까.
이론이 필요할까.
어디가 어떻게 잘 못 그려졌다는 분석이 필요할까.
내 마음인데 말이다.
다섯 살 아이가 놀이처럼 그리는 나무, 하늘, 꽃처럼 나도 우리도 그냥 우리 마음을 그려보자고 그림 모임을 열었다.
선긋기하고 데생하고 명암의 각도를 알지 못해도 내 속 마음이 바깥세상으로 출현되면 족하다고 사람들한테 그림 모임을 설명했다.
빨간 물감 바르던 붓을 파란색으로 바꾸어 칠한다. 바꾸어 칠하려면 맑은 물에 붓을 휘저어 먼저 있던 색을 빼야 한다.
어제 내어 쓰던 호흡으로 오늘을 지탱할 수 없다. 어제 내어 썼던 내 마음이 이미 묵은 것이 되어 새로운 오늘에 적용되지 않을 때, 나는 붓을 씻으면서 내 마음도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