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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May 22. 2020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

은아의 일기 #5

  

코로나가 안정세를 찾아가는 것 같아 다행이야. 백신이나 치료제는 없는 상황이니 여전히 조마조마하긴 하지만 말이야. 너의 일기, 나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았어. 우리의 방향, 같은 고민, 컨택트에서 언컨택트로의 변화를 꾀하기 참 어려운 영역에 선 사람들... 그 절절함을 나도 공감해! 역사적으로 남을 이 변혁, 누군들 예외 있겠냐만은 느끼는 체감, 반응의 속도, 대안의 자기 구체화는 상당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 오늘은 코로나 3개월 동안 거쳐온 내 좌표의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 (교환 일기의 장점이군. 나의 이야기를 적어도 한 사람은 읽어 준다는 고정 독자의 확보^^)     


이 전과 달라진 건 무얼까.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핵심적인 두 가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등교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놀랍지. 그다음 체감하는 건 마스크의 일상화! 거리엔 온통 흰색 마스크. 이러다 사람들의 눈만 기억하게 생겼어. 일상은 그렇게 흐르고 있고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가 이미 상당히 적응되었다고도 생각해.      


정말 중요한 문제는 나야!

이제껏 내가 쌓아 올린 노력들이 아날로그에 철저히 맞춰져 있다는 데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내 살아온 가치를 바꾸어 내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급박함, 두려움. 여기서 나는 깜깜한 현기증을 일으켰지!     


너도 그랬겠지만 내 꿈의 상당 부분이 책방에 녹여져 있어. 알지?

9.2평 물리적 공간만이 전부가 아닌 내게 책방은 공간을 너머 하나의 세계잖아. 그런데 그 세계가 닫혔어. 그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나도 멈췄고.     


제 아무리 AI 시대니 4차 산업 혁명 시대니 하더라도 사람의 영역까지 파고들 수 없는 고유성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유일의 세계에서만 발휘되는 것, 아련한 눈 맞춤, 눈 맞춤 너머 내게 오는 사람들의 스토리, 그 뉘앙스를 읽어내고 느껴내고 하는 것들은 실체적 공기의 흐름에서 교환되어야 한다. 서로 간의 오프라인 네트워크는 위로가 되기도 했다가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형태로 변형되었다가 서로를 뜨겁게 응원하는 연대의 가치까지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커뮤니티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또 다른 가치의 양산으로 흐르도록 하겠다.

코로나 시대에 참으로 허망한, 철저한 오프 중심의 내 꿈들!     


다른 사람들 다 몰라도 너는 알지?     

책방 오픈 전 꿈이랍시고 지인들에게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하나같은 반응! 등 따시고 배부른 이의 고상한 취미생활 내지는 철딱서니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의 한심한 이상 세계. 곧 이 책방은 재계약 시점이 되면 망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 그들의 코웃음! 적잖이 상처였지.     


오기가 발동하더라? 그들이 잘못 넘겨짚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나 진짜 최선을 다 했어. 온 힘을 기울였다구.  나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삶을 기획하자 맘먹고 달렸어. 허벅지 쿡쿡 내리치며 책 읽고 모임마다 바짝 긴장하고 사람들의 눈빛 마음빛을 예민하게 살폈어.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어도 날 밤새며 내 몫을 해내며 견뎠지.      


그렇게 시간과 노력이 쌓이니 나의 성장과 더불어 여기 모이는 사람들의 성장이 함께 보이기 시작했어.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네고 이 공간에서만은 숨이 쉬어진다는 고백을 들을 때면 울컥 눈물이 솟구쳤지. 혼자서 문어발 일을 쳐내가며 이제 좀 삶을 배워가는가 싶고 이제 좀 나에 대해서도 뭔가 알아지는 시점에 돌입했는데. 막말로 월세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내 인건비도 남긴다는 말을 떳떳하게 하는 시점까지 왔고, 코웃음 치던 사람들도 내게 드디어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바이러스 앞에 꼼짝없이 책방 문이 닫혔어.  

숨이 막혀오더라.

이제껏 나의 노력이 새로운 상황 앞에서 얼음이 된 거지.   

  

코로나 휴무를 책방 앞에 써 붙이고 돌아설 때도 그래 한 열흘이면 모든 게 제 자릴 거라 가볍게 생각했어. 보름 아니 넉넉히 3주 정도까지는 코로나 덕에 안식월을 받았다 생각하고 자유를 만끽했다. 그런데 예상할 수 없는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계획이 무산되는 한 주 한 주가 쌓여가니 그때부터는 이러다 영영 책방을 놓게 되는 거 아닌가. 슬그머니 걱정과 불안함이 내 생각에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어.      


철떡 같이 맞다고 믿었던 나의 세계, 모래바람처럼 눈앞에서 흩어지는 기분이었어. 내 세계의 그림이 그려지면 뭐해 그 그림을 담아낼 도화지가 없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매우 혼란스러웠어. 이제와 고백이지만 아이들 밥만 겨우 해댔지 한동안 모든 의욕을 상실하던 시간도 있었어. 머리 싸매고 누웠지.      


그러다가 조금씩 몸을 추스르고 생각을 바꿔먹었어.

실지 요즘 내가 주야장천 읽고 있는 책들이 이 위기 상황을 산업, 사회, 기술, 사람 별로 분석해 놓은 책들이고 거기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상황에서 나처럼 망연자실 의욕 상실이나 불러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자신의 삶을 구조 조정하는 사람들, 불확실하나마 자신의 시나리오를 조심스럽게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 눈이 보이기 시작했어. 직업이 없어지네 세상이 달라지네 백신이 언제 나오고 치료제가 몇 년에 나오는지에 귀 기울이기보다 이 위기를 내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이 훨씬 가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온몸을 통과하기 시작하더라.     


바닥을 치고는 정신이 들었어.


지금 이 시대와 이 시국과 나는 어떤 상태인가? 앞으로 나는 내 생각과 삶의 모양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켜야 할까? 곧이곧대로 맞다고 밀어붙인 내 가치는 얼마나 남겨놓고 얼마만큼 가지치기해야 하나?

그때부터는 나에게 맞는 공부를 하게 되더라. 닥치는 대로 찾고 읽었어. 지금은 다소 산발적 읽기와 생각들을 조금씩 나에게 맞추고 질서를 잡아가는 중이야.      


시대가 바뀌었다고 책방 몇 달 문 닫았다고 내가 쌓아온 노력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더라. 형태를 달리하되 속성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어. 쇳덩이를 녹여 도끼를 만들어도 쇠의 속성이 나무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책방을 꾸려온 가치가 “사람”에서 갑자기 “사람 아닌 것”이 될 수는 없지 않겠어?      


다시 모임을 재개하겠다는 공지에 사람들의 따뜻한 말들이 돌아왔어. 사람을 당분간 만날 수 없지만 만남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더라구. 앞으로 걸어갈 방향은 흐름에 맞게 수정하면 되는 거고 이 기회로 나대로의 새로운 혁신을 차근히 준비하고 그리면 되는 거겠지. 조금씩 용기가 나더라. 아니 용기가 나도록 나를 끌어올리려고 무단히 노력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새롭게 책방 문을 열 날, 공지를 띄우고 차근히 준비하는 중이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헤르만 헤센거 너도 잘 알지?

요즘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오고 있는 “알 껍질 밖의 세계”와 내가 스스로 깨고 부숴야 할 “알 껍질 속의 세계”가 부딪치고 있었어. 비로소 나의 알을 깰 수 있다는 희망이 고통 속에서 생겨났지. 투쟁이라는 말은 적당히 싸우다가 지치면 그만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미칠 듯 괴로운 고통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숙고의 시간 없이 알은 깨지지 않는다는 걸 배웠어. 9.2평 책방 속이 내 세계의 전부라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거지. 이제는 책방을 더 열심히 꾸려가되 책방이라는 공간을 어느 때고 벗어나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거 같아. 그동안 나는 좁디좁은 나의 세계를 깨고 부수느라 투쟁하고 있었던 거야.     


이번 기회로 참으로 많은 걸 배운 기분이야.

악으로 깡으로 버틴 지난 4년의 시간을 딛고 올라서서 더 가볍지만 더 단단한 내가 될 거야.     


넘 거창하니?

넘 거창해도 나의 세계를 그렇게 표현해 두고 싶네. 내 일기니까...^^     

나의 행보를 언제나처럼 지켜봐 줄거지?

(여기에 다 쓸 수가 없어. 몸으로 보여줄게^^)

또 하나! 너의 걸음 한 켠에서 든든한 동지가 될게.


우리 잘 살았다. (우리 피드백하면서 이 부분 우리 둘 자화자찬 같다고 빼라고 했지? 오글거린다고. 아니 꼭 써 두겠어. 누가 뭐래도 우린 정말 열심히 잘 살았기 때문에...)


코로나 이전 시간이 코로나 이후 시간과 180도 달라진다 해도 그 전 시간, 나의 노력, 내가 추구한 삶의 방향, 우리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 코로나 이전 노력이 코로나 이후 삶에 디딤돌이었다는 걸 발견해 낸 것, 내 스스로가 대견하고 모든 것이 감사해.     


자 책방의 묵은 먼지를 털고 우리 다시 신나게 꿈을 뛰어야지?      



         

의기소침하다가 마침내 알 깬 은아가.     

    







https://brunch.co.kr/@kuki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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