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의 일기#4
모두 자는 시간엔 늘 커피를 내리다가 지금은 네가 준 꽃차를 마시고 있어. 팬지 차는 색깔이 오묘하네. 낯선 봄 낯선 맛이라고 할까?!
벌써 장미가 폈더라. 우리에게 오월은 푸르른 가정의 달인거지. 코로나가 가족의 정을 이미 끈끈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의무 실행이 또 남았네.
이럴 때 서로 돌보고 챙기는 건 좋은데 ‘엄마의 날’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모든 엄마들에게 혼자 있을 권리, 아무것도 안 할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누가 차려준 밥 먹을 권리, 가사노동 수당을 요구할 권리, 혼자 마음 놓고 목욕할 권리, 자고 싶을 때 자고 눕고 싶을 때 누울 권리...아, 슬퍼!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누르며 살고 있는 존재가 엄마인 거잖아.
‘되어보기’만큼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우리 옛 엄마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그때는 참고 희생하는 게 미덕이었으니 ‘자아’가 어디 있었겠어.
네가 엄마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그 시절 고단함이 막 그려지는 거야.
우리는 딸을 위해서라도 ‘엄마’에 대한 정의를 끌어내리고 다시 살아야 해. 더는 후지지 않게.
드디어 아이들 개학이 발표됐어.
우리도 책방지기로 돌아갈 수 있겠다.
기분이 어때? 꼬박 3개월을 비운 자리였잖아.
날짜가 확실히 정해지니까 다시 초조해졌어.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뇌를 구석구석 떠다니는구나.
코로나 이후 모든 게 생경하더라.
몇 주 후면 돌아가겠지 했던 예상이 빗나간 것이 시작이었어. 당황했어.
불확실한 앞날이 점점 다가오니 월세 걱정만 할 게 아니더라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말은 혼돈스러웠어.
「청소기에 갇힌 파리 한 마리」에 슬픔을 받아들이는 마음 5단계가 나와. 집에서 격리 생활하며 그 감정을 단계별로 겪고 있더라니까. “예전으로 돌아가긴 글렀어!”라고 파리가 절망하듯이.
가장 크게 날아온 펀치는 ‘사회적 거리두기’였어.
일단 전염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책방 모든 모임을 중단했지. 일궈놓은 책방 생태계가 멈춘 거나 다름없었어.
문을 열고 예전처럼 다시 모임을 시작한다 해도 여전히 그대로일 수 있을까.
유구한 물건인 책을 팔아먹고사는 책방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으로의 책방은 꿈과 낭만과 현실이 뒤섞인 채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만,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착각일 수 있고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연출된 상황일 수 있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의도를 가지고 편집된 것일 수 있다’
-개벽의 징후 2020, 286p-
정말 무시무시한 말 아니니.
생각해봐. 자기계발 시대의 신념과 목표와 확신은 이미 구시대 언어가 되어버렸잖아.
오랜 시간 연마한 기술, 청년들이 손에 쥔 스펙, 선택과 판단으로 움직였던 일련 과정들이 삶의 증거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거야. 시간과 노력이 엇박자를 내고 삶이 나를 배신한다면? 현기증 난다.
뉴 노멀 시대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대형서점에 나갈 일이 있었어. 이미 매대에는 코로나19 이후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삶의 변화를 예측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와 있더라고.
나 처음으로 「기업나라」라는 경영기술매거진을 사들고 집에 왔어. 너 내 취향 알지?
우리가 책만 팔려고 책방을 연 것은 아니었잖아. 내 경우도 서재를 탐하다 간판을 달면서 ‘책과 삶을 잇다’를 모토로 삼았어. 여럿이 ‘함께’ 읽고 삶을 나누는 작은 광장이길 바라며 움직여왔지.
‘사람’이 중심이었고, 책은 매개였어. 벌써 4년을 채우고 있구나.
지금 상태를 말하자면 옳다고 여겼던 방식이 반은 뒤집어지고, 쌓아온 시간들이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야.
주말을 틈타 가족끼리 앞산도 오르고 강정보 바이크를 타러 갔어. 거기서 느낀 게 뭔 줄 아니?
세상은 이미 변해있더라는 거. 레깅스에 크롭티를 입은 파릇한 친구들이 엄청 눈에 띄는 거야. 깜짝 놀랐어. 모두들 삼삼오오 재잘대며 숲에서 자연바람을 쐬고 있더라고.
앞산 전망대에 올라 청년, 청소년들 사이에 끼어 반짝이는 야경을 보았지. 자본이 멈추고 지구가 잠시 쉬는 동안 멀리서 바라본 문명이었어. 초점 없이 멍하게 서 있는데 불빛이 얼마나 불안하게 휘청이던지.
이제 좀 버둥거리는 나를 멀리서 뚝 떼어놓고 보고 싶어 졌어. 김정희라는 인간을 앞에 두고 시나리오를 짜 보는 중이란다.
지속가능을 꿈꾸려면 가치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내 노동의 대가가 받쳐줘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발짝씩 떼어 보려고 해.
은아야, 이 전환의 시대에 너는 어떤 진화를 꿈꾸니?
방구석에서 궁리 중인 정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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