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건축관과 근대미술관
“걱정하면 소용 있나? 약차하거던 죽어버리면 고만이지!”
소설 <탁류>에서 고태수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고태수는 군산의 조선은행에 다녔다. ‘천여 석 추수를 하는 과부의 외아들’ 흉내를 내는 고태수. 고객들의 돈을 빼돌렸다. 그러기 위해서 문서를 위조했다. 사기 치고 횡령한 돈으로 방탕하게 지냈다. 남의 돈 쓰는 걸 멈추지 못 하던 고태수는 죽었다. ‘동업자’였던 친구 형보가 밀고 했기 때문이다.
길 건너에서 조선은행 지붕을 보면 ‘왜놈’의 투구처럼 생겼다. ‘은행 건축의 대가’라는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지었다. 일제가 패망했을지라도, 조선은행의 신세는 고태수보다 나았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예식장이었다가 나이트클럽, 그리고는 오랫동안 내박쳐 있었다. 조선은행이 있는 거리는 더 이상 번화가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침탈당한 근대사도 우리 역사다.”
이 한 마디는 조선은행을 일으켜 세웠다. 보수와 복원 공사를 거쳐서 ‘근대건축관’으로 변신했다. 옛날 금고실에서는 그 시대 은행이 한 일을 보여준다. 지점장실에 가면, 수탈당하는 조선 사람들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건물 뒤편의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나무 밑동에는 통로가 있어서 바다와도, 은행과도 이어진다고도 한다.
근대건축관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근대미술관이 나온다. 강점기 때 이름은 18은행. 일본 나가사키가 본사였던 이 은행은 군산에 온 일본인들에게 이자가 싼 돈을 대출해줬다. 일본인들은 그 돈으로 조선 사람들의 토지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줬다. ‘피 빨아먹는’ 고율의 이자. 땅을 잃은 조선인들은 날품팔이를 하거나 일본인 아래서 노예처럼 농사일을 했다.
근대미술관 내부는 산뜻하다. 18은행 시절의 고통스런 흔적은 없다. 기획전시를 하는 미술관이라서 작품은 주기적으로 바뀐다. 여행자들은 그림을 보면서 천천히 걸으면 된다. 아이가 칭얼대더라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미술관 규모는 조붓하다. 한눈에 쓱 훑어보고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마주치게 된 뒷문, 뜻밖의 재현관이 있다.
“우리 군산시는 안중근 의사의 고향도, 의거 장소도, 순국 장소도 아니지만, 근대역사교육의 도시라는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작은 공간이나마 안중근 의사의 희생정신과 대한독립에의 열망을 전하고자 이(뤼순감옥) 전시장을 조성하였습니다.”
황해도에서 천주교 신자로 살던 안중근.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돈의 학교와 삼흥 학교를 세웠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 마을로 가서 의병을 조직했다.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냈다. 일제에게 죽음을 구걸하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말했다.
뤼순감옥 전시장에는 그가 죽기 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쓰던 책상이 있다. 홍석구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서 안중근 의사의 글씨도 볼 수 있다. 그가 ‘얼굴을 모르는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고뇌했을, 하얼빈 역 전경이 보인다. 하얼빈에 왔지만 하루 차이로 남편을 못 만난 그의 아내 김아려씨와 두 아들 사진도 보인다. 그래서 한참동안 먹먹하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은 군산시청에서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