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 성실 말고는 별 매력 없는 조금자씨의 칠순

천만 원보다 더 좋은 선물은 무엇인가

by 배지영


“괜찮해야. 부족하믄 쓰가니? 해놓으먼 누구라도 먹는 것이 음식이여.”


손이 큰 엄마는 확고하게 말한다. 곰이 똑같은 음식만 먹고서 사람으로 변신했다는 단군신화를 믿지 않는다. 9남매의 큰딸로 자란 엄마는, 저장 식품이 아닌 나물을 한 달 내내 먹을 만큼 무친다. 돼지고기를 갈아서 만드는 동그랑땡은 김장김치 담글 때 쓰는 커다란 대야에다가 반죽한다.


엄마는 올해 일흔 살. 날마다 폭염 안내문자가 오던 8월 중순이 생일이었다. 우리는 외가 식구들과 펜션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이모들이 엄마한테 한 부탁은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소!”였다. 그러나 엄마는 김치와 간장게장부터 담갔다. 안 보고도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나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조금자씨, 한국말 못 알아들어요? 그냥 좀 있어 봐.”

“어쭈고 가만히 있겄소? 아직까지는 무슨 음식이든지 할 수 있는 기술자여라우. 느그 외삼촌들이랑 이모들한테 뭐이라도 해주고 싶은디요. 나물 서너 가지 해줄라고 깨도 볶아서 기름 짜가지고 왔어야. 깻잎 장아찌도 담고, 깨강정이랑 떡도 했제. 인자 덕자 사서 회 뜨고, 찜 하고, 소고기 육회랑 구이 사믄 끝나야.”

엄마가 스무 살이던 1968년, 외할아버지는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일 잘한다고 알아주는 일꾼의 품삯은 1년에 나락 스무 석(마흔 가마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우리 금자는 최고 일꾼하고도 안 바꾼다이”라고 자주 말했다.


일꾼은 제 때 자고 일어났다. 한없이 가물었던 그해 여름, 외할아버지는 큰딸만 데리고 나가서 깊은 밤까지 물꼬를 지켰다. 비가 퍼붓고 벼락이 치는 새벽에는 단잠을 자는 큰딸 금자만 깨워서 물꼬를 트러 갔다. 외할아버지는 ‘또랑’에 투망을 치고 잡은 붕어를, 그 자리에서 머리만 떼어내고 바로 큰딸한테 먹으라고 줬다.


“아부지! 학교에 더 다닐라요. 아부지 따라 댕김서 농사짓기 싫어요.”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그 말을 못 했다. 다 큰 딸한테 장정들이 신는 타이어 고무신을 사주는 외할아버지한테 예쁜 신발을 신고 싶다고도 못 했다. 논으로, 밭으로 다녀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그 신발. 엄마는 칼로 찢어버렸고, 외할아버지는 또 남자 고무신을 사왔다.

그 순간, 엄마의 인생 목표는 분명해졌다. “시집만큼은 내 맘대로 가자!” 때마침 친척 아주머니가 소개해준 남자는 첫인상이 좋았다. 유머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남자만은 안 된다고, 생활력이 없어 보인다고 반대했다.

“아부지,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할라요!”


앓아누운 외할아버지 앞에서 엄마는 밥을 굶었다. 가까스로 허락을 받은 엄마는 스물한 살에 결혼했다. 외할아버지의 예언은 맞았다. 엄마는 논밭에서, 식당 주방에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굴비 엮는 가게에서 일하며 자식 넷을 길렀다. 장대한 몸매에 강인한 팔뚝을 가진 아주머니로 살았다.

“느그 엄마는, 근면 성실 말고는 별 매력이 없는 사람이어야.”


일생을 아내한테 기대서 살아온 아빠의 평가는 야박했다. 엄마의 인생이 외롭고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사소한 일에도 웃는다. 집안이 떠나가도록 한바탕 웃고 나서는 “살아가는 일이 이러코 기쁠 수가 없다이”라고 말한다.

내가 자란 산골의 집, 어느 면소재지의 방 다섯 칸짜리 집, 어느 읍내의 아파트는 아빠가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아갔다. 셋집에서 셋집으로 옮겨 다닌 엄마는 예순 살에 당신 이름으로 된 집을 샀다. 우리 자매들이 살아본 적 없는 법성포구에서, 친정 부모님이 사는 이유다.


엄마가 사는 아파트 옆에는 오래된 마을이 있다. 돌담길은 사람이 안 사는 빈 집까지 껴안고 이어진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는 도시의 소공원처럼 운동기구를 들여놓았다. ‘인의산 둘레길’이라는 커다란 표지판까지 서 있다. 엄마가 세 달째 걷는 길이다.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둘레길.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경사진 헬기장 코스라고 한다. 엄마는 적당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고, 자갈을 깔아놓아서 지압까지 되는 두 번째 코스를 좋아한다. 올해 여름, 그 길은 잡풀과 칡 순으로 무성해져 버렸다.

“면사무소에 몇 번을 전화해도 안 비어줘야. 그 좋은 길을 그냥 놔두면 쓰가니? 아침마다 낫을 싹싹 갈아갖고 풀을 비면, 착착 잘 나가. 올 여름은 너무 더웠잖아. 걸어가다가 비다가 했제. 그 이튿날에 말끔한 것을 보는 재미가 있어야. 근디, (웃음) 산을 비는 사람이 어디가 있겄냐이?”

선비가 갓을 벗어서 죽순에 걸어놓고, 대밭에서 똥을 누는 사이에도 죽순은 쑥쑥 큰다. 옛이야기 속의 선비는 체면을 버리고 폴짝 뛰어서 갓을 잡았다. 여름날의 잡풀도 죽순 같은 속도로 자랐다. 엄마가 베어낸 풀은 기를 쓰고 자라서 또 칡 순과 엉키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길을 막을 게 빤했다.


엄마는 시멘트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굴비 엮는 일을 한다. 늘 다리가 아프고, 눌리는 쪽인 오른쪽 장딴지는 핏줄이 터질 것만 같다. 둘레길을 걷는 엄마의 다리는 젊은 시절처럼 가벼워지고 있다. 웅크리고 일하다가 일어나도, “오메~ 오메~”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저 걷기만 했는데도 활력과 자신감을 주는 둘레길. 엄마는 다시 낫을 들고 걸으면서 잡풀을 베어냈다. 공을 들인 만큼, 둘레길은 멀끔해지는 중이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 내 나이 칠십 살에 이런 날이 다 와야. 오늘 아침에 산에 올라가 봉게는, 면사무소에서 예초기로 풀을 싹 비어 놨드라. 그 기분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이. 크나큰 선물을 받은 것 같제. 백만 원, 천만 원 받은 것보다 더 좋아야.”

엄마는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받지 않는다. “나도 일해라우”하면서 굴비 엮는 알바를 다닌다. 굴비를 20마리씩 한 두릅으로 엮으면, 크기와 종류에 따라서 400원, 500원, 600원을 받는다. 엄마가 일하고 와서 수첩에 ‘171, 500, 다정’이라고 썼다면, 다정이라는 굴비 가게에서 500원짜리 굴비를 171두릅 엮었다는 뜻이다.

일한 만큼만 버는 돈. 엄마는 항상 돈에 쪼들렸다. 네 아이 등록금을 내고 한숨 돌리면, 다음 학기 고지서가 날아들던 삶. 더 이상 가르칠 자식이 없어서 홀가분한 엄마는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주는 칠순 축하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수에서, 인천에서, 광주에서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더 바라는 게 없다는 엄마는 당신의 동생들이 떠나고 나서야 울컥했다. 가난하게 산다고, 외할아버지 환갑잔치에 안 갔으니까. “그때 느그 외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펐을끄나?”하면서 목이 메었다. 그러나 큰딸을 일꾼으로만 여긴 외할아버지는 그립지 않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식성까지 닮았다. 도랑과 개울과 강물이 맑았던 시절, 잡은 가물치를 고아서만 먹고 회를 떠서 먹지 않은 게 한이라고 했다. 보증을 서서 논밭을 잃은 것보다 싱싱한 가물치회를 실컷 먹지 못한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

22년 전, 죽음을 앞둔 외할아버지는 우리 엄마에게만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금자야! 날씨가 섭씨 20도로 내려가야지만 생것을 먹어라이.”


온 나라가 불가마처럼 끓어오르던 여름날, 그러나 조금자씨의 칠순 잔칫상에 생것이 빠질 수가 있나. 엄마는 법성포구에서 파닥파닥 거리는 덕자 다섯 마리를 샀다. 두툼하게 회를 떠서는 사랑하는 동생들과 맛있게 나눠먹었다.


엄마는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시간을 쓰기 위해서 굴비 엮는 알바도 선택해서 다닌다. 영원히 못 배울 것 같던 카톡을 익혀서 딸들에게 보내는 사람, 지금 이 순간이 최고로 좋다고 표현하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걷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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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자씨의 일흔한 번째 생신, 지난해에 쓰고 노트북에 묻어둔 글을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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