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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Mar 25. 2016

“서울에 있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플로리스트 박상준 

“젊은 애가 뭐 하러 여기 왔냐? 이거 한 번 하면 계속 하게 된다. 오늘만 하고 오지 마!”



2011년 1월, 군산 OCI 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어른들이 상준에게 말했다. 상준은 새벽 5시 반에 일어났다. 30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소룡동 인력사무소에 갔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서 건설현장으로 갔다. 스물다섯 살이 된 상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몸 쓰는 일을 했다. 청소를 하고, 부자재를 날랐다. 끝나고 나서는 일당 6만원을 받았다.    



노가다 일을 하기 전에 상준은 건국대 시각디자인학과 학생이었다. 아트디렉터처럼 기획자의 시각을 갖기 위해 편집 디자인, 광고 디자인, 기업 로고 디자인, 패키지 디자인 등을 공부했다. 1학년 마치고 입대했다. 조치원에 있는 부대에서 포병으로 근무했다. ‘어떻게 살까?’ 생각할수록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제대하고는 ‘칼 복학’ 했다. 



“2학년으로 복학해서 1년을 다녔어요. 근데 자신감이 팍 떨어졌어요. 친구들이 작업한 걸 보면, 제가 너무 모자란 거예요. 다른 일들처럼 미술도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휴학을 했어요. 부모님이 학비랑 생활비를 대주셔서 알바도 안 했는데 일이 절실해졌어요. ‘안 해 본 걸 해 보자. 무조건 혼자 여행을 가 보자’는 생각으로 군산 집에 왔어요.” 



바닷가 도시 군산, 겨울바람 속에는 칼날이 들어있다. 상준은 자전거를 타고서 도시 외곽 에 있는 공사현장에 다녔다. 추웠다. 얼굴 살갗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그는 버티고 싶었다. 노가다 일은 그가 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 곰도 사람으로 변신시키는 마법의 시간 백일, 상준은 열흘 모자란 3개월을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그는 대형마트로 일터를 옮겨갔다. 초밥 파는 곳에서 석 달을 더 일했다. 생활비 하면서 모은 돈은 5백만 원. 상준은 유럽여행 준비를 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혼자 여행해 본 적 없었다. 두려워서 하루하루 일정을 딱딱 들어맞게 짰다. 어디서 자고, 어떻게 이동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유럽의 역사와 문화, 소설책을 찾아서 한 달간 읽었다.  



“처음에 런던으로 갔어요. 미술관이랑 박물관이 다 무료예요. 제가 가볼 수 있는 데는 다 갔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아요. 비싸니까 그냥 햄버거 먹을 때도 있었고,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도 알아내서 갔어요. 파리에서도 좋았어요. 숙소 마당에 체리나무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랑 술 먹다가 안주로 체리 따 먹는 게 재밌었어요. 자그만 도시들도 갔고요.”



상준은 유럽의 소도시들에 이끌렸다. 같은 나라 안에 있어도 저마다 색다른 느낌을 가진 도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그는 ‘학교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포화상태인 서울, 한 가지 일에 도전하려고 해도 압도적인 진입장벽에 부닥치는 곳. 그는 나고 자란 군산에서, 군산만의 특색을 만들고 싶었다.


여행은 섬세하게 짠 일정표대로 되지 않았다. 날마다 변수가 생겼다. 영어를 못 해서 겁냈는데 부딪치니까 다 됐다. 그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라며 담대해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상준은 학교에 복학했다. 작업을 하면서 ‘내가 그렇게 쫄 필요가 있었나?’ 생각했다. 그는 자신만의 졸업 작품을 만들었다. 졸업하고는 군산으로 내려왔다. 



“지방에서도 충분히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 저희 어머니예요. 제가 유치원 다닐 때 어머니가 꽃집을 시작했어요. 처녀 시절에 좋아했던 일이셨대요. 꽃집 하면서도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꽃에 대한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셨죠. 독일까지 가서 공부 하고 오셨어요. 지금은 꽃집을 하면서 군산대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도 하세요.” 



상준씨는 스물일곱 살에 ‘꽃집 총각’이 되었다.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일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밤 9시까지 근무했다. 일하면서 꽃을 배워나갔다. 처음 1년은 방황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한숨)앞이 안 보이네’ 하면서 후회했다. 오래 떨어져 지낸 어머니랑 일 하는 것도 어색했다. 또래 친구가 없는 건 더욱 힘들었다. 


그의 집은 시내와 떨어져 있는 옥산, 바깥 활동이 많은 어머니와 출퇴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는 꽃가게 4층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지냈다. 겨울에는 전기장판 깔고서 지낼만  했다. 여름이 되면서 그가 자는 옥상 방 천장은 달아올랐다. 꽃집에서 올라오는 모기들은 아마존 밀림 수준으로 달려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물어 뜯겨 있었다. 



집 같지 않은 집에서 사는 각박함.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다는 답답함은 상준씨를 우울한 청년으로 만들었다. 교회 다니는 어머니가 템플 스테이에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다닌 적도 있다. 위안은 됐다.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었다. 상준씨는 중고차를 한 대 샀다. 텃밭도 가꾸어놓고, 마당에 꽃도 피고 지는 옥산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꽃집에서 1년 힘들게 지내고 나니까 꽃이나 그림, 디자인이 다 새로웠어요. 그걸 만든 제작자의 감성이 보였어요. 혼자 방황한 것도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사람들에게 꽃다발 하나를 해주더라도 마음을 열고, 더 감성적으로 다가가 보니까 달랐어요. 잠깐의 만남이지만 손님들과도 더 소통할 수 있게 됐어요.” 



상준씨는 꽃집에서 꽃바구니를 만든다. 꽃다발 포장을 한다. 화분을 관리한다. 청소년 직업체험 부스를 열거나 직업체험 수업을 맡아서 한다. 남자 플로리스트, 학생들은 신기해하면서 선뜻 다가와 준다. 서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꽃집 일을 한다는 얘기를 하면 눈을 반짝인다. 그 애들은 ‘꽃집 횽아’를 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새롭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제 상준씨는 템플 스테이를 가지 않아도 마음이 고요하다.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덕분이다. 꽃집이 있는 개복동 거리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많다. 상준씨는 “돈 모아서 재밌는 걸 해 보자. 문화적으로 키워보자”고 뜻을 모은 조권능 선배와 작은 디자인 회사를 열었다. 상품 디자인이나 선물 상자 디자인을 주문받아 납품한다.


 

“개복동에서 행사를 열려고요. 도자기, 그림, 사진, 음악 등 콘텐츠는 되게 많거든요. 지방은 한계가 있어요.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소수라 그래요. 아쉽죠. 동네마다 청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요. 물론, 우리 대에 이뤄질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발판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요.” 



상준씨는 지방을 ‘기회의 땅’이라고 본다. 서울에서 고군분투하는 친구들과 후배들한테 “군산 한 번 와!” 초대도 많이 했다. 일제에게 수탈 받은 상처를 보여주며 근대문화를 키워가는 동네를 보여주었다. 그 안에서 상준씨 같은 청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방에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정책도 개선될 거라고 확신하니까. 


그는 꽃집에서 일하면서 천천히 자라는 문화를 생각한다. 꽃도 문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국화꽃이 핀 담장을 쓸었다. 초를 켜서 꽃 그림자를 감상했다.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며 감동했다. 꽃은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도구다. 사람들은 고마움이나 기쁨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 꽃을 선물한다. 꽃 사러 오는 사람들 마음에는 순정이 있다. 



“식탁에 꽃 한 송이 놓고 밥 먹으면 되게 좋잖아요. 그게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차이는 놔 둔 사람만이 알아요. 생활하기 빠듯한 사람들은 꽃을 사치품이라고 해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목마름이 있어요. 그 때 만난 꽃은 한 송이로도 사람 마음을 흔들죠. 감성을 줘요. 사람들이 꽃을 알게 되면, 사는 게 조금은 더 풍요롭죠.”



지난해 여름 방학, 상준씨는 유치원생, 초등 저학년생 아이 여섯 명과 플로리스트 수업을 했다. 함께 꽃을 자르고, 꾸미고, 꽂아 봤다.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있는 꽃을 화분에 옮겨 심었다. “집에 가서 잘 키워!” 하나씩 들려 보냈다. 봉우리 진 꽃이 피어나는 걸 보고 오게 했다. 며칠 동안 꽃을 지켜본 아이들을 만나는 경험, 상준씨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차라리 돈으로 줘!”



중년의 남편이 청년처럼 근사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면, 아내는 말한다. 아이 낳고 기르고 밥벌이하면서 살다보면, 꽃은 사치품이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꽃집 청년 상준씨는 “그 심정을 이해해요. 꽃은 비싸잖아요”라고 했다. 그래서 더 꽃이 사람들에게 주는 그윽한 감성을, 향기를,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꽃집은 보통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다. 상준 씨가 일하는 꽃집은 상권이 빠져나간 구도심에 있다. 꽃집의 미래를 본다면, 주거지역인 나운동이나 수송동으로 옮기는 게 맞을 거다. 그러나 상준씨와 어머니는 그 자리에 있다. 포장이나 꽃의 디자인 연구를 더 하고, 꽃을 알리는 강의를 연다. 손님들은 여전히 “꽃 사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왔어요”하면서 찾아온다.  



‘꽃집 청년’ 3년차, 상준씨는 청년들을 모아서 일을 벌이고 싶다. 서울에서처럼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없지만, 군산만의 뭔가를 만들고 싶다. 꽃에 대한 욕심도 있다. 독일에 가서 배우고 올 생각이다. 가끔은 ‘서울에 남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좀 아찔하다. 그래서 바로 지금, 플로리스트 일을 하는 상준씨 자신이, 꽃집이 있는 군산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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