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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Mar 25. 2016

영화 <광해>속 궁중음식, 제가 만들었어요

궁중음식 전문가 서수정

“<광해, 왕이 된 남자> 엔딩 크레딧 자막에 제 이름은 없어요. 그래도 저는 만족해요. 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엄마 성함은 나와요. 음식을 감독한 사람이니까요.”   


 

수정씨는 음식을 하는 사람.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나온 모든 음식은 그녀와 언니 수미씨가 직접 했다. 궁중음식을 30년 이상 배우고 해온 어머니는 현장 지휘자 역할. 집에서 갖고 간 유기그릇은 그대로 영화 소품. 순금으로 거북이가 새겨진 왕의 은수저도 어머니가 모은 물건. 워낙 비싼 거라서 독이 묻어 색깔이 변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다른 수저를 썼다.  



영화 촬영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촬영 시간 자체도 길다. 수정씨 자매와 어머니는 재료를 준비해 가서 남양주의 영화 세트장에서 만들었다. 촬영용 음식은 배우들이 대개 먹는 시늉만 한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인데 버려서는 안 될 일, 기방 만담꾼이었다가 왕 노릇 하는 하선(이병헌)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그는 진짜 잘 먹었다. 뱉지 않았다. 



1984년에 태어난 수정은 옛이야기에 나오는 아기처럼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큰딸을 낳고, 몇 번이나 유산한 뒤에 아들을 낳았다. 또 잃었다. 어머니는 “아들 낳게 해 달라는 건 욕심이에요. 딸도 좋아요. 건강한 애기만 갖게 주세요” 라며 오랜 불공을 드렸다. 언니와 일곱 살 차이로 태어난 수정. 부모에게 자식 낳아서 키우는 재미를 다 느끼게 해 줬단다. 



“제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근데 음악 했다는 얘기를 잘 안 해요. 그걸 완성을 못 해서, 사람들 눈에는 끈기 없게 보일 것 같아서요. 어릴 때부터 음대 가려고 대회도 많이 나갔죠. 그런데 고2 때 슬럼프가 왔어요. 음악으로는 앞날이 안 보이는 거예요. 피아노를 치면, 목이 꽉 막히는 것처럼 힘들었어요. 부모님한테 취미로만 할 거라고 했죠.”



갈 길을 바꾼 수정은 생각보다 홀가분했다. 일단은 남들 하는 공부를 따라갔다. 대학은 무조건 ‘인 서울’. 그런데 어머니가 난공불락이었다. 막내딸을 먼 데로 보내기 싫어했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교가 최고야”라며 수정을 설득했다. 구체적인 꿈이 없던 수정은 어머니가 정해준 대학교에 지원했다. 여학생들이 많이 가는 식품영양학과로 갔다.   


 

수정의 어머니는 수십 년간 서울에 있는 궁중음식연구원에 다닌 사람.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 대접하기를 즐겼다. 오십대 중반에는 궁중음식 전문점 ‘지미원’을 차렸다. 예약만 받는 식당, 어머니가 바쁜 날에 수정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찍 집으로 와서는 투덜거렸다. 일하는 사람들과 잡일을 했다. 부엌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엄마 편하라고 계속 도운 거지, 요리할 생각은 없었어요. 대학 2학년 가을인가. 엄마가 유자청을 만들려고 유자 껍질 포를 떴어요. 유자가 많으니까 처음으로 ‘저도 해 볼까요?’ 칼을 잡았어요. 유자 껍질 포 세 장 뜨기를 하는데 너무 잘 되는 거예요. 더 얇게 다섯 장 뜨기를 했는데 또 잘 돼요. 채도 뜸벙뜸벙 안 썰고,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곱게 썰었어요.”



그 뒤로 어머니는 음식하면서 수정에게 간을 보게 했다. 고기처럼 야채도 결이 있다는 걸 가르쳤다. 실파도 하나하나 씻어서 마른 행주로 결을 잡아 닦게 했다. 어머니는 수정에게 “궁중음식연구원 실습 나가볼래?”라고 물었다. 수정은 딱히 싫지 않아서 실습생으로 갔다. 장독대 닦고, 화장실 청소하고, 재료 준비를 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은 수정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수정은 “너무 힘들어. 완전 싫어”하면서 저항했다. 어머니가 하는 음식점은 테이블 회전을 하지 않는다. 그 한 끼니에 온 정성을 쏟는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중노동에 가까웠다. 손님들 대접하는 데 2-3시간. 손님들이 돌아가면, 주방 청소를 하고 유기그릇을 닦는 데 기본 3시간이 걸린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 늘 고민을 했어요. 뭐 하고 살까 그런 거요. 어느 날 음식을 했는데 너무 고급스럽게 나온 거예요. 전에는 미적 감각이 타고난 사람만 음식을 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플레이팅(장식)이 잘 됐어요. 저도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그 뒤로 차츰차츰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느새 ‘나도 음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수정씨는 궁중음식연구원에 계속 다녔다. 우리나라 호텔 한정식의 1인자인 최난화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서 실습을 했다. 궁중음식연구원의 병가원에서 떡, 한과, 차를 배웠다. 한 번 들은 강의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찾아서 들었다. 음식 하는 재미를 알게 되니까 똑같은 강의를 들어도 새로웠다. ‘배우는 기쁨’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꼈다.



학교 졸업하고 수정씨는 여전히 배우는 사람.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고도 싶었다. 큰돈 들이는 일이라 무턱대고 갈 자신은 없었다. 꼼꼼하게 알아보고 미국의 ‘CIA 요리학교’에 탐방을 갔다. 막상 가서는 ‘한국 음식도 다 모르는데 이국음식을 접목해서 얼마나 새롭게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10대 때 미국 요리학교에 온 한국 학생이 수정씨에게 말했다.   


  

“나는 된장, 고추장, 간장 같은 한국음식을 너무 혐오해요. 숙성시킨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놔두는 건 비위생적이에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때 수정씨는 ‘한국음식을 더 잘 알아야 해. 나는 아직 서양음식 공부할 단계가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전통요리를 고수해온 일본으로 가 봤다. 도제식 교육에는 기술뿐만 아니라 장인정신까지 스미어 있었다. 초밥 가게, 전통 소고기 가게, 술 담그는 가게는 모두 초라했다. 주방장들은 연로했다. 그러나 아우라가 있었다. 제자들은 속으로도 ‘스승한테 빨리 배워서 빼가야지’라고 하지 않는단다.  



감동받은 수정씨는 일본 최초로 조리사 교육을 한 ‘나카무라 조리제과전문학교’에 탐방을 갔다. 자기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와 닿았다. 음식 공부하러 유학을 간다면, 망설이지 않고 일본을 선택할 것 같았다. 수정씨는 같이 간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서 나카무라 조리제과전문학교의 학교장에게 질문을 했다.



“음식을 배우는 학생이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음식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손님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까?”

“매우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한평생 음식을 만들었던 장인은 자신의 삶과 어릴 때 만난 스승을 얘기했다. 돈을 주고 음식을 파는 사람과 돈을 주고 음식을 먹는 사람 사이에도 마음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얘기했다. 좋은 음식 재료에 정성이 더해지면 손님도 알아봐 준다고. 수정씨 마음은 맑아졌다. 그렇게 음식을 대하는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녀의 어머니 유현자씨.   


 

2009년, 수정씨는 경기대학교 대학원 외식조리관리학과에 진학했다. 조리를 직접 하지 않지만 외식과 마케팅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궁중음식연구원에 계속 나가면서 거의 모든 음식을 전수 받았다. 언니 수미씨와 둘이 '제2회 세계 한식요리경연축제' 중부권역대회에 나갔다. 호박꽃 속에 전복, 해삼, 두부를 넣은 음식 ‘청사초롱’으로 대상을 받았다.



“‘청사초롱’은 굉장히 호응이 좋았어요. 당근으로 정과(쫄깃하고 달게 조린 것)를 만들어서 등까지 밝혔어요. 이태리에서 오신 분이 거기도 호박꽃 요리가 있긴 한데 저희가 만든 음식이 더 독특하고 맛있대요. 대상 받고는 뉴욕에 갔어요. 한식 홍보도 하고, 재밌게 놀았죠. 저한테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예요. 굳이 나갈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까요.” 



석사를 마친 수정씨는 음식 재료들을 속속들이 공부하고 싶었다. 곧바로 원광대학교 대학원 식품영양학과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몇 곳의 대학에 출강도 한다. 그녀는 엄격한 선생. 학생들에게 재료의 성질을 알고 칼질이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속도와 기술은 나중 일이라고. 학생들은 그렇게 세심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수정씨는 당연하다고 답한다.   


 

그러나 수정씨도 학생 때는 “음식을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해야 돼요?”하며 어머니한테 따진 적 있다. 10년 넘게 친 피아노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그러라고 해 준 어머니는 음식 할  때는 달랐다. 그 덕분에 수정씨는 성장했다. 어머니가 어릴 적에 전해들은 음식, 어머니가 보는 고서 속에 나오는 음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 얘기만 듣고도 재현해 낸다. 



“어릴 때는 다른 엄마들도 다 음식을 잘 하는 줄 알았어요. 손님 초대를 많이 해서 집에 항상 손님이 많았거든요. 아빠 회사 분들이 오셔서 엄마 음식 먹고 다들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게 기억나요. 외가 식구들이랑 늘 엄마가 해 준 음식을 먹었어요. 음식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알게 된 거죠. 결국은 제가 음식을 하고 있고요.”


수정씨는 대학원에서 차 연구를 하느라 가끔 밤샘을 한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스탠딩 파티나 바자회 때 먹을 음식을 만들기 위해 서울 출장도 자주 간다. 어머니 식당 ‘지미원’에서도 주도적으로 일한다. 음식 만드는 일은 여전히 노동, 자연스럽게 잔 근육이 생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와 손님들의 관계를 눈여겨본다. 어머니의 음식을 알아본 손님들은 지속적으로 식당에 온다. 돈이 오가는 관계인데도 서로가 마음 쓰며 감동을 받는다. 수정씨는 이제 외국으로 나가서 음식을 배워오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어머니가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철학을 배워서 온전하게 이어가고 싶다. 그 자체를 지키고 싶다는 수정씨가 말했다. 



“이건 너무 좋은 직업인 거예요. 음식은 먹고 없어져도 행복한 마음은 오래 남잖아요.”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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