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화기획사 ‘우깨’ 대표 원민
“너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
2006년 3월, 전주대학교 중문학과 1학년 담임교수는 원민에게 물었다. 보호자 칸에 어머니 이름만 쓴 민은 “아버지한테 독립해서 살아가려고요”라고 말했다. 갓 스무 살이 된 민은 아버지를 이해 못 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에게 “네 인생은 네 거다. 네가 개척하고 책임을 져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는 스무 살이 되면 용돈도 학비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그는 중국어를 전혀 모른 채로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는 시험 기간에만 하고 그저 놀았다. 돈을 주지 않는 아버지한테 지기 싫어서 식당, 편의점, 서점, 주유소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1학년 마치고 입대했다.
“전북 임실 탄약청에서 탄약검사병으로 복무했어요.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들여온 지뢰, 포탄 등을 써요. 그게 쓸 수는 있는데 오래된 탄약이어서 해체를 해 봐요. 한 박스에 하나 정도를 골라서 불량인지 아닌지 검사하는 거예요. 미국 군무원 두 명이랑 같이 일했어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아, 외국어 공부 좀 해야겠구나’ 생각 많이 했죠.”
민은 제대하고 복학했다. 등록금은 군대 가기 전에 모아놓은 돈으로 냈다. 취업 생각만 했다. 아침 7시에 도서관에 가서 버스 끊길 때까지 혼자서만 공부했다. 학점은 모두 A+. 2학년 2학기 때 교환학생이 되어 중국 상하이로 갔다. 강의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있었지만 민은 주로 길거리에서 지냈다. 현지인에게 말 걸었다. 석 달째부터 의사소통이 됐다.
그는 한 학기 지내고 상하이에서 심천(홍콩과 1시간 거리)으로 학교를 옮겼다. 일주일에 한 번씩 홍콩에 갔다. 그곳에 있는 세계적 기업들을 탐색하고 다녔다. 홍콩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주말마다 그 친구의 친구들, 그 친구의 식구들과 영어로 말하며 지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영어도 중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중국 간 지 열 달 만에 중국어 시험 HSK 고급을 땄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중국여행을 했어요. 심천에서 상해, 서안, 우루무치, 티베트, 윈난성 등 13개의 성을 갔어요. 윈난성은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아요. 차별 받으니까 한족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요. 거기서 만난 소수민족 할머니가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어요. 멋진 건물이나 수려한 장관보다는, 자기 삶을 고수하는 할머니 모습이 더 좋았어요.”
여행 마치고 그는 다시 윈난성으로 가서 한 달을 지냈다. 그 할머니도 찾아갔다. 돌아보면, 중국말을 빨리 하고 싶어서 ‘돌아이’처럼 굴며 살았다. 택시를 타도 “아저씨 잘 생겼어요” “오늘 날씨 좋아요” 같은 말을 꺼냈다. 중국으로 여행 온 한국 사람들에게 가이드 할 만큼 말이 늘었다. 교환학생 끝나고는 알바해서 모아 놓았던 돈으로 5개월간 여행도 했다.
2012년, 민은 전주대 중문과 3학년 2학기로 복학했다. 그의 목표는 변함없이 취업.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써 넣고 싶어서 통역봉사를 2천 시간 했다. 평창 스페셜 올림픽, F1 코리아 그랑프리, 세계예술치료캠프, 태권도 세계대회에서 통역봉사 온 전국의 대학생들을 만났다. ‘이네들과 경쟁을 해서 취업해야 되는데 쉽지가 않겠구나’를 실감했다.
“통역봉사도 ‘학교 급’이 있어요. 서울의 알아주는 대학에 다니면 고급 의전을 가요. 저는 지방대라는 벽을 느꼈어요. ‘대학원에 가서 학벌 세탁을 할까? 편입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열등감이 생겼어요. 오랫동안 제 멘토를 해 주신 한 교수님이 ‘지금은 학벌보다 실력이 중요한 사회야’ 라면서 저를 말렸어요.”
민은 보여줄 수 있는 건 스펙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어는 이미 고급, 영어도 토익 900점을 넘겼다. 일본어 2급, 한국사능력 자격증도 땄다. 영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그는 4학년 2학기에 한국관광공사 싱가포르지사 인턴이 되었다. 그곳에서 서류 번역을 했다. 행사 때면 현지인들과 부스를 만들어서 관리했다. 재미있어서 관광 공부를 신 나게 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대부분 계약직. 그래도 다들 자기 목소리를 내며 일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그만두는 게 당연했다. 그 사람들은 미련을 두지 않고, 다른 회사와 계약해서 떠났다. 싱가포르에서 6개월 일한 원민씨, 정규직 전환이 안 됐다. 그러나 그는 실패라고 여기지 않았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겠다는 꿈은 그대로였다.
2013년 한여름, 원민씨는 싱가포르에서 전주로 돌아왔다. 스물일곱 살 ‘취준생’으로. 혹시나 해서 관광공사 홈페이지에 들락거렸다. 채용공고는 뜨지 않았다. 어떤 직장이든 들어가야 할 처지, 수십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한 달 만에 어느 대학의 평생교육원 외국어 지원팀에 채용됐다. 전환형 계약직,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정규직원이 될 수도 있다.
“외국어 수업 커리큘럼이나 취업 영어, 영어 인터뷰 수업을 정했어요. ‘어떤 게 대학생들한테 효과적일까’ 고민하면서 강의를 만들었어요. 시민들이나 초등학생 상대로 영어 수업도 만들었고요. 그 안에서 해보고 싶은 게 되게 많았어요. 그런데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별로 없었어요. 결국 6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그는 대학에서 일하는 동안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해 관계를 단절해버리는 학생들. ‘혼밥(혼자 밥 먹음)’을 하고, ‘아싸(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책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를 보면, 한국 대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외로움’이라고 한다. 의지할 데가 없다고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버리는 학생들, 원민씨는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작년 2월, 청년구직자가 된 그는 페이스북에 ‘우리가 깨달은 것들(우깨)’를 열었다. 그가 학생 때 겪기도 했고, 사회인으로서 본 대학생들의 고민을 하나씩 정리해서 올렸다. ‘좋아요’ 추천이 늘면서 조회 수가 높아졌다. “오프라인 모임 안 하시나요?”라고 묻는 사람들도 생겼다. 원민씨는 “‘좋아요’ 5백 넘으면 할게요”라고 했다. 나흘째에 목표 달성!
지난해 4월, 벚꽃 핀 군산 은파유원지. 처음으로 ‘우깨(우리가 깨달은 것들)’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다. 전주와 익산 군산에서 온 대학생은 18명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고갔다. 터놓고 얘기하는 게 가능했다. 원민씨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놀라웠다. 그 모임에서 1박 2일로 캠프를 열자는 의견이 나왔다.
“4월 말에 바로 ‘없애기 프로젝트’ 캠프를 열었어요.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핸드폰과 인터넷도 없이 서로 이야기만 하는 행사였어요. 그 뒤로 매달 캠프를 열었어요. 취업, 대학생활, 성, 자격증, 스펙 같은 주제 20개를 조 별로 나눠서 얘기해요. 발표도 하고요. 밤새가면서 자유롭게 토론도 하고요. 인문학 공부하는 ‘와우산방’에서 숙소 지원을 받았어요.”
원민씨가 네 번째 소통 캠프를 열었을 때부터 서울, 부산, 강원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로 20대 초중반이었다. 꾸준히 오는 이들은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는 것에 매력을 느껴요”라고 했다. 원민씨가 만든 ‘우깨’는 각자 섬처럼 고립된 청년들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나도 힘들고 내 친구도 힘들어서 꺼낼 수 없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연대의 자리였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보면, 2010년에 일본에서 휴대전화 벨소리로 가장 많이 다운로드 받은 노래는 니시노 가나의 <만나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라고 한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는 사람들 마음을 파고들었다. 언제든 통화 가능한 스마트폰이 있고, 태평양 건너에 사는 사람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는 SNS가 있는데. 왜?
“작년 12월에 토크 콘서트를 했는데 113명이 왔어요. 성공한 사람이 아닌, 비슷한 고민을 가진 청년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힘을 얻는 거예요. 원래 비즈니스를 목적에 두지 않고 시작했는데 행사를 할수록 가능성이 보였어요. 그래서 우깨를 창업했어요. 지금은 외주 행사를 하고 있어요. 5월에 한옥마을 뒤 벽화마을 축제도 기획하고 있고요.”
우깨에는 ‘착한 클래스’도 있다. 각자 받는 시급만큼 내고 강의를 듣는다. 1시간에 5,580원 받고 일한다면, 강의료도 그만큼만 낸다. 지금은 중국어 수업만 있지만 착한 클래스를 더 늘릴 생각이다. 함께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강의를 열고 강사가 될 수 있다. 청년들 스스로 가진 재능을 나누면서 배우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포부가 큰 청년을 닮아 우깨 사무실은 넓다. 전주의 구시가에 있어서 임대료가 싼 덕분이다. 무대까지 만들어서 대관사업도 한다. 스터디 룸도 따로 있다. 야심차게 준비한 셰어 오피스는 월 25,000원만 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현재 신문기자와 청년사업가, 유통 관련 창업 팀이 입주해 있다.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코워킹 프로젝트’를 꿈꾼다.
“디자이너, 영상, 출판, 예술... 10명의 사람들을 모아 셰어 오피스를 하고 싶어요. 나중에 같이 책도 내고 콘서트도 하고요. 다양한 소통 프로그램도 항상 고민해요. 꿈을 이뤘다는 가정 하에 ‘몽夢페스티벌’도 하고요. 취업의 벽에 막혀 우울한 청년들이 발랄해지도록 ‘백수 페스티벌’도 하고요. 현실이 힘들어도, 함께 모여서 뭔가를 해보자는 거예요.”
살아가는 일이 외롭고 험난할수록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꽉 붙든다. 제각각 살길을 찾는다. 밥을 함께 먹거나 고민을 얘기하는 일마저 소용없다고 깎아내린다. 그러나 살다보면 안다. ‘인생의 80%는 실패의 연속’, 세상은 결코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좌절한 당신 곁에 누군가 있다는 믿음이 삶을 이끌어간다. 우깨 대표 원민씨는 그 일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