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지영 Mar 25. 2016

‘드럽고 치사하지만’ 미국 주방에서 10년 버텼다

군산 ‘뉴욕부엌’ 셰프 김인혜

“As we don't speak the same language, I can't work. What's up? (너랑 말 안 통해서 일 못하면 어떻게 해?)”



셰프 포지션 인터뷰를 하는 사람은 인혜씨에게 말했다. 백인 남자 주방장들 사이에서 일하는 7년차 아시안 여자 셰프. 인혜씨가 트레이닝 시킨 후배들도 때가 되면 승진을 했다. 그녀는 몇 년째 제자리였다. 그녀에게만 “다음에는... 다음에는 기회가 올 거야”라고 했다. 인혜씨는 속으로 한국말을 했다. ‘아휴, 진짜 드럽고 치사하네’라고.    



2004년 12월, 인혜씨는 1년 계약 인턴으로 미국 코네티켓주 모히간선 카지노호텔(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에 갔다. 호텔 안에는 레스토랑이 많았다. 인턴들은 메인 키친, 뷔페, 이탈리안 레스토랑 등의 업장을 돌며 3개월씩 일을 배웠다. 인혜씨는 셰프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셰프가 이걸 시키겠구나’ 싶은 것을 간파하면서 일했다.  



“호텔에 한국인 인턴이 80명 정도 있었어요. 1년 인턴십 끝나고 다 돌아가는데 총주방장이 저보고 ‘1년 더 계약하자’고 했어요. 다섯 명한테만 1년짜리 워킹 비자를 내준 거죠. 제가 손이 빨라요. 대학 입학 전에 대전의 한 연회장에서 주말마다 일했거든요. 너무 하고 싶어서 무보수로 1년간을요. 방학 때는 무주리조트 직원식당에서 일했고요.” 



워킹 비자를 받았어도 인턴과 같은 처지. 셰프 포지션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허드렛일이나 잔 요리를 하지 않는다. 능력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게 달라진다. 요리에 참여할 수 있다. 인혜씨는 호텔 연회장에서 스페셜 메뉴를 만들었다. 베지테리언(채식) 음식을 만들고, 스테이크를 굽고, 사이드 메뉴를 만들었다. 한 번에 2-3천 명이 오는 파티였다.  



미국 사람들은 1주일에 40시간 근무한다. 인혜씨는 시급 9불을 받으며 일주일에 70시간씩 일 했다. ‘오버타임’ 이라서 페이(주급)도 많아졌다. 호텔 연회장은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었다. 조찬 파티가 많이 열려서 새벽에 출근했다. 저녁에는 파티가 더 많았다. 연회장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8명. 대규모 파티 때는 다른 업장에서 일하는 셰프들도 와서 도왔다.  



“(웃음) 노가다예요. 노가다. 3천 명 오는 파티도 많이 했어요. 크리스마스 되기 전에는 임플로이(직원) 파티를 해요.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이 만 명 넘거든요. 그분들 먹을 수 있게 준비하죠. 호텔 안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도 일했어요. 가드망제라고 찬 요리 파트를 맡아서 했어요. 샐러드도 만들고요. 호텔이니까 레스토랑도 24시간 열어요.”


호텔 주방에서는 인턴, 쿡, 마스터 쿡, 마스터 셰프, 수 셰프, 레스토랑 셰프로 진급한다. 워킹 비자 끝나고 영주권을 받은 인혜씨는 ‘쿡’이 되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페이도 점점 높아졌다. ‘마스터 쿡’이 되고부터는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 교육도 맡아서 했다. 그렇게 호텔 주방에서 7년간 일했는데 더 이상의 직급을 안 줬다.



어린 인혜의 꿈은 호텔 총주방장. 부모님은 군산시 영화동에서 족발 집을 했다. 그녀는 가게 나가서 일을 돕는 게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한식과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공부도 잘 해서 대전 우송대 외식조리학과에 들어갔다. 전공 책에 나오는 조리 용어는 모두 영어, 수업도 영어로 했다. 인혜씨는 요리와 영어를 동시에 열심히 했다.   



“아침식사, 점심식사, 저녁 식사를 따로 15주씩 배워요. 몸에 익히려고 아침식사 때는 새벽 5시에 등교해요. 아침식사 내는 시간에 맞춰야 하니까요. 학교에 레스토랑이 따로 있어요. 호텔 조식 느낌으로 다른 과 친구들한테 대접해요. 점심식사는 베이직 스킬, 칼질부터 배우고요. 중식, 일식, 제과제빵, 궁중음식도 배워요. 깊고 다양하게 음식을 배우는 거예요.” 



대학 2학년 때, 인혜씨는 ‘서울 국제 요리대회’에 몹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팀을 꾸렸다. 차가운 요리는 수십 가지, 더운 요리는 세 코스로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 없던 요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책을 많이 찾아봤다. 원래 있는 요리에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세 달 동안 연습했다. 시간도 많이 들고, 음식 재료 사느라 돈도 많이 들었다. 



차가운 요리는 대회 전날에 미리 만든다. 반짝이게 젤라틴 처리를 해서 요리대회 당일에는 전시만 한다. 더운 요리는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를 대회 장소에서 만든다. 심사위원의 심사도 받고, 현장에서 판매도 한다. 꼭 참가해보고 싶었던 요리대회, 인혜씨는 상까지 받았다.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학교생활이 재밌었어요. 일식 동아리 활동 하면서 많이 놀기도 했고요. 일식은 여자 분들이 많이 없으니까 희소성도 있잖아요. 우송대는 4학년 때는 저처럼 해외로 나와서 1년간 인턴을 했어요. 그래서 미국에 온 거예요. 살아남고 싶었어요. 같은 호텔에서 7년간 일했는데  저는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만뒀어요. 애기가 생기기도 했고요.” 



인혜씨는 딸 올리비아를 낳고 길렀다. 아기가 돌을 맞을 즈음, 호텔에서 일할 때 알고 지냈던 셰프가 그녀에게 일자리를 소개시켜줬다. 일반 레스토랑에서 디저트와 빵을 책임지는 페스트리 셰프. 주말이나 명절, 크리스마스에는 더욱 바빴다. 주방을 정리하고 퇴근하는 시간은 늘 깊은 밤이었다. 아기 키우는 엄마에게 셰프는 악조건의 직업이었다.   



“셰프는 시간을 자유롭게 못 써요. 그래서 카지노 딜러도 해봤어요. 미국 전역에 ‘메이시’라는 백화점이 있는데 거기서도 알바로 향수를 팔았어요. 화장품 매장에서도 일했고요. 제가 한국말로는 소극적이지 않은데 아무래도 영어를 할 때는 눈치를 보는 게 있어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런 점을 극복 하려고 했어요. 잘 팔지는 못했죠. 그래서 접었어요.”



인혜씨가 업장의 주방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려웠다. 베이비시터에게 딸 올리비아를 맡기면, 1시간에 10불.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데에는 시간이 들었다. 어느 날은 ‘이럴 바에는 일 안 하고 아기 키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올리비아를 프리스쿨(어린이집)에 보내고, 네일샵에서도 일했다. 요리하러 온 미국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인혜씨는 어떻게든 요리를 계속 하고 싶었다. 딸 올리비아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의논할 사람은 친정어머니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한테 짐이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어머니는 “한국으로 와! 엄마 아빠가 있잖아”라고 했다. 올해 6월, 그녀는 부모님이 있는 군산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취직을 하려고 했죠. 레스토랑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넣었어요. 다들 제 경력을 부담스러워 하시더라고요. 마침 여름 방학이 됐고, 두 군데 초등학교에서 쿠킹 클라스를 열었어요. 제가 아동요리 자격증도 따놨거든요. 근데 친척이 식당 자리가 있다면서 ‘수송동인데 싸’ 그러더라고요. 가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보자마자 맘에 들었어요. (웃음) ‘해 보자!’ 그러면서 바로 계약했어요.” 



큰 길에서 떨어져 있는 가게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인혜씨는 전기공사만 맡기고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 조잡하지 않게, 짜깁기 한 분위기가 나지 않게 신경 썼다. 공사하면서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외국인에게 인사했다. 몇 번 마주치니까 “여기에 레스토랑 열어요. 친구들이랑 놀러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9월에 작은 식당 ‘뉴욕부엌’을 열었다. 


인혜씨는 배짱이 있었다. 홍보를 하지 않았다. ‘한 번 와서 먹어본 사람은 또 오시겠지’라고 생각했다. 식당 공사할 때 만났던 외국인도 진짜로 찾아왔다. 군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는 그는 친구들도 데려왔다. 그의 친구는 인혜씨의 음식을 먹어보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소문은 퍼졌다. ‘뉴욕부엌’도 그만큼의 속도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미국에 살 때, 간절하게 한국음식 먹고 싶은 날이 있었죠. 군산에도 외국인들 많잖아요. 자기네 고향 음식이 생각나고 먹고 싶겠죠. ‘뉴욕부엌’은 미국 사람들이 흔히 먹는 음식이 주 메뉴예요. 미국식 파스타 라구파파델레가 있거든요. 갈비로 하는 거예요. 준비하는 데만 이틀 걸려요. 한국식 갈비는 핏물 빼고 양념 하는데 미국식 갈비는 달라요.



핏물을 빼지 않고, 양념을 한 다음에 겉에를 살짝 익혀요. 뜨거운 불에요. 그러고 나서 끓이는 거예요. 그거를 우족으로 육수를 낸 게 있어요. 사골하고 육수를 여기서 따로 내요. 다시 하루 정도 끓인 국물로 파스타 소스를 만드는 거죠. 외국인들은 스테이크 샌드위치도 좋아하세요. 필라델피아에서 많이 먹는 필레치즈 샌드위치도 많이 드시고요.” 



식당을 열고 네 달째. 인혜씨는 아직도 쉬는 날을 정하지 못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식당 일을 하며 보낸 부모님. 어머니는 몸도 여기저기 아프다. 아직도 딸이 요리하는 걸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손녀를 돌봐주고, 날마다 새벽시장에 나가서 싱싱한 채소와 해산물을 사다가 식당에 가져다준다. 부모는 뜻을 세우고 사는 자식을 이길 수가 없다. 



“주방 기구 팔아요?”



어떤 사람들은 ‘뉴욕부엌’이라는 간판만 보고 들어와서 묻는다. 색다른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와서 음식을 주문한 사람들은 “처음 먹어본 맛이에요”라며 감탄한다. 미국에 있는 호텔과 레스토랑 주방에서 10년간 일한 셰프가 만든 ‘미쿡 맛’이니까. 옆 테이블에 앉은 외국 사람들이 자기네 모국어로 말하며 식사하는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있고.    


 

인혜씨는 야외 공간에서 바비큐를 즐기고, 수제 맥주도 원액부터 직접 만들고, 라이브 밴드도 있는 식당을 해보고도 싶다. 지금은 혼자서 하니까 테이블 다섯 개짜리 식당이 딱 알맞다고 본다. 밤에 퇴근하면, 우리글에 심취한 여섯 살 먹은 올리비아가 “엄마, 한글 공부해요” 라고 조르는 것도 좋다. 딸아이를 돌봐주는 부모님과 사는 것도 좋다. 요리를 하며 사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