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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Mar 26. 2016

8년 만에 어린이집 교사에서 교수 됐습니다

군산 호원대학교 아동복지학과 조교수 서영미

“태어나서 1984년생 교수 면접은 처음 보네요.”



군산 호원대학교 강희성 총장이 영미씨에게 말했다. 영미씨도 조교수 면접은 처음이었다. 그 전에 영미씨는 국공립어린이집 교사 면접, 민간어린이집 원장 면접, 육아종합지원센터와 대전과학기술대학 겸임교수 면접 등을 봤다. 떨어진 적도 있고, 붙기도 했다. 2014년 3월, 유아교육 현장에서 8년간 일한 영미씨는 호원대학교의 최연소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익산시 춘포면, 영미가 나고 자란 마을은 30여 가구가 살았다. 버스는 하루에 세 번만 다녔다. 마을 아이들은 통틀어서 열 명. ‘부지깽이도 나서서 일손을 보탠다’는 농사철이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살뜰하게 살피지 못했다. 초등학생 영미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도 됐다가 선생님도 됐다. 아이들이 고집 부리고 떼를 써도 짜증나지 않았다. 영미는 말했다.



“이 다음에 커서 꼭 어린이집 선생님 할 거야.”



중학생이 되면서 동네 아이들과 놀 여유는 없었다. 춘포에는 초등학교만 있다. 중학교부터는 오전 6시 50분 첫차를 타고 익산시내로 다닌다. 영미는 학교 선생님 도움으로 짬짬이 한국화를 배웠다. 상도 여러 번 타고 소질 있다는 칭찬도 받았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그런 거 하면 밥 못 먹고 살아서 안 돼”라고 했다.   


  

고등학생 영미는 수포자(수학 포기한 학생). 성적이 우수하지 않았지만 가고 싶은 대학은 뚜렷했다. 4년제 대학의 유아교육학과. 봉사를 할 때도 꼭 어린이집에 신청서를 내고 갔다. 청소를 돕고, 보조교사 역할을 했다. 대학 가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병설유치원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바라던 대학에는 못 갔다.   


 

“3년제인 원광보건대학 유아교육과에 갔어요. 어차피 전문대하고 4년제 사범대하고 자격증은 똑같으니까 빨리 임용고시를 보자고 생각했죠. 대학 들어가니까 공부가 저하고 딱 맞더라고요. 수학이랑 과학 같은 게 없으니까 날아갈 것 같았어요. 다 좋았어요. 실습 나가서 ‘어떻게 해? 잘못 온 것 같아’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저는 재밌더라고요.”  



그녀는 성적 장학금을 받아서 학비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성인이니까 생활비는 스스로 벌고 싶었다. 고3 입시 끝나고부터 방학 때마다 큰 규모의 레스토랑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한꺼번에 여러 개를 드는 접시가 무거워서 손목이 시렸지만 사람들 만나는 게 재미있었다. 레스토랑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음료 가격도 알았다.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영미는 생과일주스를 팔기로 했다. 창업자금 30만원은 믹서기 두 대 사는 데에 썼다. 아이스박스는 집에 있는 것을 갖고 다니기로 하고. 자리를 물색했다. 익산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한 가전제품 대리점, 점장을 찾아갔다. “학비 마련하려는 학생인데 전기 좀 끌어 쓸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셨어요.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까지 장사를 했는데 접었다 펴는 테이블 위에 믹서기랑 얼음 가는 거 놓고 시작했어요. 한 잔에 천원인데 하루에 보통 250잔은 팔았어요. 비가 오면, 대천해수욕장에 가서 폭죽을 팔았고요. 장사 끝나고 집에 가서는 무조건 사과 박스에다가 그 날 번 돈을 부어놨어요. 하나도 안 꺼내 썼어요.



장사하면서 생각해 봤죠. 학교 졸업하면, 어린이집 교사로 평생 살 거잖아요. 노점상은 두 번 다시 못해 볼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더 신 나게 두 달 동안 했어요. 마지막 날에는 사과 박스에 든 돈을 방바닥에 쏟았어요. 보기에는 엄청났는데 재료비랑 이것저것 빼니까 큰돈은 아니었죠. 제 노점에 와 준 친구들이랑 밥 먹고 여행 갔어요.”


 

영미씨는 국공립 어린이집(정부지원 시설, 나라에서 인건비를 지원하니까 호봉 체계가 있음. 우리나라 어린이집의 6%만 이에 해당)에 취업했다. 어릴 때부터 바라던 일이었다. 담임을 맡고 처음 만난 다섯 살 아이들. 되도록 많은 것을 허용해주는 교사가 되려고 바깥놀이도 많이 하고, 활발하게 노는 걸 장려했다.


 

자잘한 사고는 있었다. 한 아이가 수업 시간에 ‘교구’로 놓아둔 콩을 콧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코를 흥! 풀어”라고 했다. 다섯 살 아이는 말소리로만 “흥!” 했다. 다행히도, 콧물에 콩이 불어나기 전에 꺼냈다. 아이들 셋이 모여서 사흘간 나눠 먹을 물약을 한꺼번에 ‘원샷’ 해 버리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항의했고, 영미씨는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래도 영미씨는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아이들을 키우면 성장을 못 한다고 여겼다. 칼이 위험하다고 강조하니까 아이들은 연필 깎을 줄을 모른다. 한 반 15명의 아이들, 소풍갈 때 줄 서서 가는 것만 강조하면 앞 친구 뒤통수만 본다. 영미씨는 아이들에게 흐트러져도 좋다고 했다. 마음껏 나다닐 것 같은 아이들은 교사의 시선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놀았다. 



“1년 근무하고 다른 어린이집(처우가 더 좋음)에 이력서를 냈어요. 원래 가려고 했는데 못 가서 아쉬웠거든요. 면접 가보니까 저만 3년제 대학을 나왔어요. 모두 4년제 유아교육학과 출신이더라고요. 거기 떨어지면서 제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죠. 바로 방통대 유아교육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어요. 처음부터 원하는 어린이집에 갔으면, 평생 안주했을지도 몰라요.”



어린이집 정규 근무시간은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7시 반. 쉬는 시간도 따로 없다. 밥도 아이들과 같이 먹는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평가인증제 기간에는 야근도 많이 한다. 영미씨는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방통대학을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유아교육 대학원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여자는 결혼 잘 하는 게 먼저야”라고 반대해서 몰래 다녔다.  


5년. 한 곳의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면서 석사까지 마치는 데 걸린 시간. 영미씨는 전라북도 육아종합지원센터(8급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에 이력서를 넣었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떨어졌다. 그녀는 좌절하는 대신 사치를 택했다. 한 달간 유럽 단체 배낭여행을 갔다.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제각각이었다. 어린이집 교사 말고도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와서 바로 충남 보령의 민간 어린이집 원장으로 갔어요. 2년 계약으로요. 교사가 여덟 명에 0세부터 7세까지 아이들 92명이 있었어요. 원장은 행정적인 일만 해서 쉬운 줄 알았어요. 근데 걱정이 많은 자리더라고요.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고 있어야 하고, 다 책임을 져야 해요. 아동학대나 급식사고, 차량사고가 나지 않게 늘 신경 썼어요. 눈 오면 차량 걱정에 어린이집 마당을 다 쓸었고요.”    



민간 어린이집 원장을 무사히 마친 영미씨. 하고 싶은 일은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한 번 떨어진 적 있는 전라북도 육아종합지원센터(어린이집을 지원·관리하고 육아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적 공공기관)에 지원했다. 합격! 영미씨는 어린이집 교직원에게 다양한 교육과 육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 1주일에 한 번은 대전과학기술대학의 겸임교수로 출강했다. 



평일 오후 7시에서 오후 10시. 퇴근한 영미씨는 집으로 간 적 없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도 드물었다. 대학원 공부는 끝났어도, 미술치료, 동화 구연, 가베, 심리상담 같은 공부는 쉼 없이 찾아다녔다. 유아교육에서만큼은 부족함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육아종합지원센터 계약이 끝날 무렵에는 호원대학교 아동복지학과 조교수에 지원했다. 채용됐다.  



“제가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어린이집 교사가 많아요. 만학도죠. 저는 솔직하게 해외 유학파도 아니고, 일류대학 출신도 아니라고 말해요. 좋아하는 일을 빨리 선택하고, 최선을 다 해서 일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고요. 학생들한테 유아교육 현장에 맞는 비전을 제시해 주죠. 한 달, 1년, 5년, 10년의 계획을 짜보라고 해요. 저도 늘 스케줄러를 쓰니까요.” 


현재 영미씨는 군산 육아종합지원센터 사무국장이다. 그녀가 조교수로 있는 호원대학교에서 3년간 위탁 경영하기 때문이다. 영미씨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도록 상담하고 컨설팅 한다. 집에서 엄마랑 크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시설도 꾸려가고, 부모교육도 한다. 어린이집과 가정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이다. 대학 강의는 주 2일, 야간에만 한다. 



“젊은데 빨리 성공해서 좋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영미씨에게 말한다. 그녀는 아직 모자란 게 많다고, 배울 게 한참 남았다고 대답한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서 주인공 계나는 남자친구의 누나를 비꼬면서 ‘꼬맹이 애들 보살피는 걸 뭘 대학원 가서 배우고 있어?’라고 한다. 영미씨에게는 무례한 말이다. ‘꼬맹이’들도 똑같은 사람, 사람 공부는 끝이 없다.   


 

“진짜 장난 아니야. 내 애를 키워봤어도 너무 힘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애들 보는  선생님이야.”



어린이집 교사로 재취업했던 엄마들이 하는 말이다. 반면에 영미씨는 어린이집 교사 시절이 가장 행복했단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좋아한다고 매달렸다. 영미씨가 맨발로 투명양말을 신은 척 연기하면 그대로 믿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 입에서 “내 새끼들”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힘이 이끌어주어서 유아교육을 계속 공부했다. 



사립대학들은 2년에 한 번씩 연구실적 평가를 해서 교수를 재임용한다. 처음에는 조교수, 다음에는 부교수, 그 다음에는 정년이 보장되는 정교수가 된다. 뜻밖이다. 영미씨가 틈 날 때마다 쓴다는 인생 스케줄러의 최종 지점에는 유아교육과 관련된 일이 없다. 그림을 그리면서 봉사하러 다니는 노년의 영미씨. 그녀 옆에는 작년에 결혼한 남편 강일구씨가 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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