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청년 김상연
상연이 최초로 ‘갑작스런 죽음’과 마주한 곳은 군대였다. 우리나라 성인남자의 평균 수명 약 80세, 상연은 자신에게 남은 생이 60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속에 품은 이상을 다음으로 미루고 살 여유가 없다고 느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오늘부터 해야 한다고.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상연이 어릴 때에 부모님은 주말부부였다. 아버지는 군산 대우자동차에 다녔다. 어머니는 광주에서 상연과 나영 남매를 기르면서 24시간 국밥집에서 일을 했다. 남매가 학교 갈 시간에 퇴근한 어머니는 주무셨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어머니는 이미 일터에 나가고 없었다. 누나한테 많이 의지하고 자란 상연은 늘 생각했다.
“이 다음에 결혼하면, 나는 진짜 화목한 화목을 가정을 만들 거야.”
상연이 제대하고 와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출근하는 어머니 안아드리기. 대화도 별로 안 하고, 스킨십은 아예 없이 살던 식구들은 경악했다. 어머니는 “징그럽게 왜 이래!” 하며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했다. 상연은 끄덕하지 않았다. 2주쯤 지나니까 어머니는 출근할 때 현관 앞에서 상연을 기다렸다. 결국, ‘식구끼리 안아주기’는 가풍이 되었다.
군산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자동차공학부 2학년으로 복학한 상연. 가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아동가족학과의 ‘부모 교육’ 강의를 들었다. 내 감정을 드러내서 얘기하는 ‘나 전달법’을 배웠다. 그때까지 상연네 식구들이 주고받은 짧은 대화는 ‘너 전달법’이었다. 행동이 없는 배움은 허상, 상연은 어머니한테 ‘나 전달법’으로 얘기하자고 했다.
“어머니가 ‘나 전달법’을 알고 나서는 점점 달라지셨어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셨어요. 그 전에 저는 어머니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 다 알지 못 했어요. 강한 분이라서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을 안 하셨는데 그런 얘기도 다 하셨어요. 덕분에 저는 3학년 때부터 부전공으로 아동가족학을 공부했어요.”
복학생 상연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도시락을 직접 싸가지고 다녔다. 하루 일과는 운동과 공부뿐. 다행히도 전공 공부는 적성에 맞아서 재밌었다. 성적도 1등. 그러나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독거노인들 집 고쳐주는 일이었다. 오래된 집에 찾아가 단열재를 붙였다. 방 안을 새로 도배하고 장판을 깔았다. 냉장고 정리도 해 주었다.
배를 타고 군산 개야도에 들어가서 집을 고친 적도 있다. 사람들은 정말 얇은 벽으로 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아이들과 놀이를 하는데 여자아이가 계속 쓰러졌다. 영양실조로 달팽이관이 손실 되어서 그렇단다. 상연은 서울까지 가서 집을 고친 적도 많다. 한국 ‘헤비다트’와 ‘서부발전’이 같이 하는 집 고치기 사업에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보태기 때문이었다.
“집고치는 팀들이 참여하는 UCC 사진 대회가 있었어요. 수도권 학생들도 많죠. 다른 팀들은 1년 동안 집고치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었어요. 저희 팀은 여름에 고쳐준 집을 겨울에 다시 찾아가서 후속 인터뷰 영상을 만들었어요. 군산 경찰서 뒤쪽에 있는 집이었는데 할머니하고 지적장애 아들하고만 살았어요. 콘셉트가 달라서인지, 저희 팀이 1등을 했고요.”
사실 상연에게는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 남들이 “여친이야?”라고 묻는 친누나 나영씨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누나는 웹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면서 주말에는 사진 찍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영씨가 카메라를 업그레이드 하자 남은 보급 기종 카메라는 군에서 제대한 상연의 눈에 들어왔다. 복학생 상연은 꽃과 풍경 사진을 하루에 100장씩 찍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들을 찍었다.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쓰레기봉투도 찍었다. 카메라 렌즈로 보는 세상만물은 제각각 의미가 있었다. 상연은 대학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진을 찍었다. 상대에 대한 애정을 품을수록 인물 사진은 잘 나왔다. 사람들이 사진 좋다고 반응해 줄 때마다 재미있었다. 보람을 느꼈다.
대학 4학년 때, 상연은 해외봉사 가는 학생들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사 자격으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갔다. 교육봉사, 한국 학생들은 준비를 많이 해간다. 가져간 교육 내용을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다. 성과를 내는 사진은 반드시 찍어야 한다. 한국 대표가 현지 학교의 교장 선생님에게 돈 전달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때 상연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진을 찍잖아요. 거기 아이들은 말도 안 통하는데 1년간 정규수업을 해외봉사 대학생들한테 내준 거예요. 2주마다 대학생들은 계속 바뀌고요. 봉사 단원들은 마치고 나갈 때 ‘야! 오늘 끝났다. 뭐뭐 하고 놀자’ 고 말해요. 그러니까 현지 아이들이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좀 허무해요. 이별하는 게 익숙해서 우는 아이도 없고요.
단기간에, 그 나라에 없는 교육을 하고 오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1-2년 동안 유지가 된다면 몰라도요. 차라리 그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주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장기적으로 머무르면서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진짜 대화를 하는 게 중요해요. 스펙을 쌓기 위해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 해외봉사 가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해 여름, 졸업을 앞둔 상연은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여의도로 출근하는 사람,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전국을 돌며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청춘순례’를 1년간이나 해왔다. 차세대 정치 리더캠프에도 참여하고, 한 국회의원의 보좌관 인턴을 하면서 국회 안에서 열리는 토론회마다 찾아다녔다. 그가 원하던 일이 확실했다.
그러나 진입장벽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았다. 방 한 칸도 없는 상연이 서울에서 얼마만큼 버텨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도전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의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식구들이 희생해야 한다. 학교 졸업하고, 줄곧 ‘투잡’을 해서 저축한 누나의 돈까지 헐어야 한다. 한겨울, 상연은 군산으로 내려왔다.
“졸업도 다가오니까 힘들었죠. 근데 취직은 너무 하기 싫은 거예요. 부모님한테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어릴 때부터 ‘공부해라’고 한 번도 말 한 적 없는 부모님이 그때도 ‘알아서 잘 해라’고 하셨어요. 저는 맘 놓고 한 달간 방황했어요. 지역에서 과연 무슨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서울에서 지낼 때 보고 들은 게 많이 생각났어요.”
서울에서는 대학 졸업하는 게 경사가 아니었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사진도 친구 몇몇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찍었다. 상연은 졸업 스냅사진을 ‘상품’으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에게 사전 인터뷰를 해서 그들의 추억이 담긴 캠퍼스 곳곳에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대학마다 가판을 설치하고 샘플을 보여주면서 영업한다면... 가능성이 보였다.
올해 2월, 대학을 졸업한 상연씨는 ‘백수’가 되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상연씨는 불안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아기 사진, 커플 사진, 결혼식 사진, 돌잔치 사진을 찍고 있는 누나한테 정식으로 배웠다.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이 편안하게 집으로 출장도 갔다. 아기 엄마들이 카메라 앞에서 편안하도록 노력했다. 그러고 나면 예쁜 사진이 나왔다.
“누나한테 둘이 스튜디오를 차리자고 했어요. 사진은 주로 주말에 찍으니까, 평일에 누나는 디자인 일을 하고, 저는 교육 콘텐츠를 하자고요. 우리나라는 모든 게 서울에 몰려 있어요. 파워포인트나 포토샵 같은 강의도 지방은 형식화 되어 있어요. 자격증만을 위한 거라서 실생활에서 쓰려면 또 서울 가서 배워야 해요. 토익 점수도 다 서울 가서 따잖아요. 서울에는 각종 강의는 많지만 강사들이 설 자리는 부족하니까 지방에서 판을 열고 싶어요.”
상연씨도 몇 달간 살아본 서울. 그곳에 살아야만 ‘제대로’ 길을 찾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주던 서울. 상연씨는 그게 기성세대들이 돈 벌기 위해 만든 상술 같다고 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길을 가기 위해 애쓰는 건 낭비라고. 그래서 상연씨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지역에서 일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최근에 상연씨는 여자친구의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을 찍었다. ‘노년학’ 강의를 들을 때에 80세 넘는 어르신들을 찾아다닌 적 있다. 그분들도 젊은이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당신들의 얘기를 해주는 것도 좋아했다. 그때 ‘이분들 사진을 찍어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실행에 옮겼는데 잘 했다. 여자 친구의 조부모님은 적극적으로 포즈를 잡았다.
“사진 찍으면서 느끼는 건데 부전공으로 아동가족학과 공부하기를 잘 했어요. 저는 남자 후배들한테도 많이 권해요. 가족도 배우고, 노년도 배우고, 대화법도 배운다고요. 그걸 알고 나니까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잘 하지는 못해도, 어머니한테 밥을 차려드리기도 해요. 아버지 안아드리는 것도 자연스럽고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은 시합을 앞둔 권투선수의 사진을 찍기 위해 체육관에 갔다. 상연씨도 그렇게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 달 뒤에는 누나 나영씨와 스튜디오도 연다. 사진사에게 비싼 돈을 내지 않고도 찍을 수 있는 셀프 스튜디오도 있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게 방법을 알려줄 거예요”라고 했다. 국회로 출근하고 싶었던 청년은 이렇게 동네 사진사로 살아간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