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치지만, 당신만은 ...

초원사진관

by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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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스무 살에 군산 사람이 되었다. 직장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서 자취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도 고향에서 데려와 건사했다. 직장 다니며 살림하는 게 몸에 익자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가끔씩은 사는 게 고달팠지만 남의 삶을 부러워한 적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대쪽 같은 J의 삶은 딱 한 번 흔들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군산에서 촬영할 때였다. ‘카톡’도 없던 1990년대 후반, 배우 한석규와 심은하가 영화를 찍고 있는 현장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야, 지금 서초등학교 앞이래”, “은파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있는 것 봤대” 같은 말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J도 직장에서 일을 하며 그 얘기들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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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들 저녁밥을 해놓고 대학 수업에 가야 할 J. 어느새 촬영장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월명동과 군산 시내 곳곳은, 정원(한석규)과 다림(심은하)이 함께 거닐고 머문 곳이 되었다. 정원의 친구 철구가 스물아홉 살 마지막 날에 “술 먹고 죽자!”고 말한 횟집(지금은 빈집)조차 J에게는, 군산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장소가 되었다.



“아까 저 때문에 화났었죠? 날씨도 덥고 아침부터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정원(한석규)이 저렇게 말하면서 하드를 건넬 때, 다림(심은하)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그날 정원은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불치병에 걸린 그는 닥쳐올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을 거다. 어릴 때에 엄마를 잃은 정원은, 방과 후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엄마처럼, 아버지와 자신도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는 생각을 했던 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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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초원사진관’을 영화와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했다. 영화 촬영에 쓰였던 소품들도 그대로 갖다 놓았다. 다림이 타고 다녔던 주차위반 차량도 있고, 정원이 출장 사진 찍으러 갈 때 탔던 오토바이도 사진관 앞에 두었다. 그러나 첫 월급 탄 다림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입술에 침 발라 봐요”라고 말하던 정원은 (죽고) 없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정원은 삶을 정리하면서 다림을 보았다. 먼발치에서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다림이 들을 수 없는 독백으로만. 다림은 갑작스럽게 문 닫은 ‘초원사진관’ 앞에서 서성인다. 어느 날은 편지를 넣고, 또 어느 날은 사진관에 돌을 던진다. 다림에게 정원은 추억으로만 그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알겠다. 사람들은 추억 하나로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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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은 남상천 작가, 네 번째 사진은 군산시청에서 제공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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