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걸음걸이
넉 달 전쯤 무기력을 깨워보겠다고 무작정 걸으러 나온 날이 있었다. 동네 뒷산의 풍경은 지루해져서 본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성주사를 향해 걸었었다.
나른한 휴일의 오후. 오늘은 느즈막한 점심을 먹고 어디라도 걸어볼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가을 마냥 찹찹한 2월의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새 가을을 알려오던 그날의 공기가 생각나더라. 우울에 잠겨있느라 가을이 오는지도 몰랐던 그때. 작년의 기억을 몰고 온 바람을 따라 성주사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은 무척 다를 테다. 같은 장소, 달라진 나. 그곳에 가면 과거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나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는 길이 멀다. 차 소리는 시끄럽고. 한 시도 걸음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애꿎은 핸드폰만 뒤적거리다 밀리의 서재를 열어 어제 읽던 책을 보면서 걸어본다. 흔들리는 화면에 시야가 흐려진다 오디오북이나 들어볼까. 막상 틀고 나니 갑자기 메일함을 확인하고 싶어 진다. 이 산만함을 어쩌면 좋지. 밀린 뉴스레터를 확인하다가 눈길이 가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오, 이거 한번 신청해 볼까? 오디오북 소리는 저 멀리 보낸 지 오래다.
차도 옆 솔한 인도를 따라 계속 걷는다. 분명 집을 나설 때는 잡음에서 벗어나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주위가 소란하다. 이러려고 걸으러 나온 건가. 에잇. 오디오북 소리마저 소음 같이 느껴진다.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디오북을 꺼버리려는데,
띵.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나 보다. 빨간 불로 조금 더 버텨보려나 했는데 예고 없이 검은 화면으로 뒤바뀌어 버리네.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들었다.
야옹.
검은 야옹이 한 마리가 노르스름한 달빛 같은 눈동자로 똥그랗게 지켜보고 있다. 멈춰 서서 야옹이와 눈싸움을 시작한다. 사방이 고요해진다. 여전히 차들은 쌩쌩 지나가고 있건만. 부쩍 조용해진 틈새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차도는 점점 멀어지고 오색 빛으로 늘어선 연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늦은 오후의 햇살과 맞닿은 거리가 참 아름답다. 그런데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을 못 찍네. 아아. 아쉬워라. 두 눈으로 긴 풍경을 담아본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새파란 하늘에 줄줄이 걸린 전신주가 보인다. 오전에 디자인 작업 하면서 봤던 눈금자 같기도 하고. 사이사이로 걸린 하얗고 붉은 구슬들이 꼭 로또 추첨 구슬 같네. 또는 운동회 박 터뜨리기. 너네는 열면 뭐가 들어있니? 모르니까 더 궁금하고 기대되는 거겠지? 마치 당첨 번호가 공개되지 않은 복권처럼.
성주사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그때와 다른 길목으로 입장해 버렸다. 아무렴 어때. 들어선 문은 달라도 단정한 풍경은 변함이 없다. 유치원에서 월요법회를 하러 방문했던 때도 떠오른다.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늘의 감상은 사진이 아니더라도 꼭 남겨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열려있는 종무실 문을 향해 “저기요”라고 용기를 내본다. 종이와 펜 한 자루만 빌릴 수 있겠냐고. 그렇게 남겨진 오늘의 생각 조각들.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사는 것 같아. 지금 내가 걷는 건지, 밥 먹는 건지, 음악을 듣고 있는 건지도 모를 만큼.
산속에 들어선 사찰에서 평평한 바위를 벗 삼아 글을 쓰니, 들려오는 건 조르르 시냇물 소리, 설 맞아 성주사를 찾은 가족들의 대화 소리. 나 지금 이런 바깥소리를 듣고 있구나. 내 안에서는 이런 마음이 일어나고 있구나.
자연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미처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빛을 경험한다.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려오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두 눈에 담긴다. 또 적당히 찹찹한 2월의 공기가 까슬히 두 뺨을 스친다.
실은 요즘 난 말야, 배우고 싶은 것도 만들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생각이 어지러웠거든. 새벽까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책을 읽고, 상상하다 보면 한껏 들떠버린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손 쓸 수가 없었어. 머리는 쉬질 않지, 마음은 자꾸 조금만 더 해보자고 그러지, 너무 피곤한 거야.
그런데 오늘, 성주사에 다시 와보니 어지럽던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지네. 걷길 잘했다. 여기에 다시 오길 잘했다. 종이와 펜, 덥석 용감하길 잘했다. 숨이 깊이 들어오고, 길-게 나가고 있어.
그럼 이제, 천천히 일어서볼까?
돌아가는 발걸음엔 또 어떤 즐거움이 찾아들지 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묵은 곳에 있던 생각들도 꺼내보고, 어제 생각하다 멈춰둔 기획도 다시 꺼내어 재정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머릿속 도화지에 거침없이 펜을 휘갈기며 개요를 짜보기도 한다.
핸드폰이 꺼지고 나니 떠오르는 영감과 기획 관련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흩뿌려지는 것 같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외워놔야 하는데, 집에 가서 한 번에 와르르 쏟아서 적어야 하는데. 머리 좀 식히려고 걸으러 나왔다가 오히려 머리통에 불만 지른 셈이다.
종무실에서 종이와 펜을 빌려주신 덕에 기록할 수 있었다. 1시간 동안 걸으면서 했던 생각들을 글로 게워내고 나니 무겁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으로 쓰는 감각. 매년 열리던 안민고개 백일장에 아빠랑 같이 가서, 바위에 걸터앉아 글을 쓰던 때도 생각나고. 그때 쓴 글이 생애 첫 장원을 받은 작품이었을 거야.
다음에는, 핸드폰은 놔두고 올 지라도 종이와 펜은 꼭 챙겨 다녀야겠다. 언제 어떤 생각과 영감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walking holiday!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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