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다. 가령, 밤 11시에 회사에 있는 상황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조금 즐거웠다. 이런 말 하면 철없다고, 아직 어리다고,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에는 야근이라는 게 누가 ‘야근하세요!’ 해서 하는 건 줄 알았다. 현실은 그게 아니더라고.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으니 자연스럽게 늦게까지 일하는 것이었다. 내가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몇 주 뒤에 콘퍼런스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발표 준비를 해야 해서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설마 야근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하루는 발표 자료를 넘겨줘야 하는데 마감일이 다음날이었다. PPT도 필요하고 대본도 써야 하고 시연 영상도 필요하고. 수정은 무슨 1차 완성본도 없고. 만들어 둔 시연 영상도 없고. 오늘 오후에 작업 시작했고. 퇴근 시간은 오후 5시고. 절대 그 안에 완성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야근행 열차에 탑승했다. 탑승자는 나, 팀장님, Y 매니저님, N 매니저님.
잠깐, 여기서 짚고 가자. 우리는 모두 개발자다. 그런데 팀장님은 PPT 자료를 만드시고, 발표자인 N 매니저님은 대본을 작성하셨다. 나는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걸 녹화하고, Y 매니저님은 내가 녹화한 영상을 편집하셨다. 다들 개발자인데 개발 아닌 일로 야근하고 있는 아주 웃긴 상황. 미디어에는 에러 만나서 고치느라 고군분투하는 개발자가 나오던데? 나의 현실은 파워포인트, 워드, 영상 편집 툴이었다.
지금에서야 저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할 수 있지, 그때는 너무 긴박해서 그럴 겨를도 없었다.
‘빨리 완성해야 해! 실수하면 안 돼!’
‘나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이런 거라도 잘해야지!’
내 역할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녹화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실수할까 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금이면 ‘실수하면 어쩔 거야. 죄송하다 하고 다시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때는 그런 마음먹을 여유도 없었다. ‘쌩신입’이었으니까.
녹화를 다 했는데 N 매니저님이 대본에 어색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다. 바짝 집중해서 눈도 안 감고 대본을 읽었다. 화면으로도 보고 프린트도 해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다른 색 볼펜으로 밑줄도 쳤다. 한참 보고 있는데 팀장님이 말했다.
“저녁 먹고 하자.”
저녁? 저녁 먹는 거였어? 생각도 못 했다. 그러고 보니 야근 식대라는 것도 있었지. 아무리 야근 식대가 있다지만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먹을 곳이 있나? 주변 식당은 다 닫았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매니저님들이 익숙하다는 듯 김밥천국에서 먹자고 하시는 것이다. 대체 왜 익숙하세요. 무섭게. 그런 의문을 속으로 삼키고 있자니 N 매니저님이 김밥천국에서 저녁을 포장해 오셨다.
포장해 온 김밥과 쫄면을 빈 책상에 늘어놓고 둥글게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여기는 회사인데 꼭 대학교에서 야간작업하는 기분이야. 그래서인지 긴장이 살짝 풀어졌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인지 나는 불쑥 머릿속에 있던 질문을 모두에게 해 버렸다.
“어쩌다 개발자가 되셨어요?”
이건 내가 당시에도 ‘어쩌다 개발자가 되었습니다’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Y 매니저님이 물었다.
“넌 어쩌다 개발자가 됐는데?”
“음, 디자인학과에 갔는데 코딩을 가르쳐서요.”
“전산학과에 갔는데 코딩을 가르쳐서.”
‘저 아저씨가...?’
내가 눈으로 욕하는 걸 들었는지 Y 매니저님이 부연 설명을 해 주셨다. 너무 길고 전문 용어가 많았는데 요약하자면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는 내용이었다.
“N 매니저님은요?”
“나? 이게 뜬다고 하길래?”
여기 ‘어쩌다 개발자’가 한 명 또 있다!
팀장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기만 하셨다. 개발자로 일하신 지 이십 년은 훨씬 넘으신 팀장님은 이 질문이 귀여워 보이지 않으셨을까.
요즘 어쩌다 내가 개발자가 되었나 하는 내용의 글을 쓰려고 한다고, 그래서 여쭤봤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팀장님과 매니저님들의 옛날이야기, 일명 ‘라떼는 말이야’를 연달아 들을 수 있었다. ‘라떼’는 재미없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살아있는 역사를 듣는 기분이었지. 야근하면서 업무가 아닌 다른 주제의 대화도 가능하구나. 신기하기도 했고.
업무 외 시간이라는 풀어짐이 주는 여유. 평소에는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가 오고 가는 시간. 이렇게만 본다면 야근이 업무 효율은 정말 떨어진다. 자주 할 건 아닌 것 같다. 좋은 점이 있다면 쌩신입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어줬다는 것?
‘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내가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는구나. 너무 풀어져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굳어있을 이유도 없구나.’
그날을 계기로 나는 우리 팀에 조금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굽이 높은 구두 위에 몸을 싣고 있다가 운동화로 갈아 신은 것처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래서 오늘 11시까지 야근하라고요? 아,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저 집에 가 보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