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싶은 옷을 입어보자

by 서초량

개발자라는 직업의 장점.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다. 아마도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개발자 패션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다는 말은 곧 옷을 대충 입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다든가, 공대생의 정석 체크무늬 셔츠라든가, 떠오르는 패션 아이템 회색 후드티라든가.


나는 개발자치고는 옷을 대충 입지 않는 편이다. 체크무늬 셔츠는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항상 그림이 없는 무지 티셔츠만 입고, 후드티도 회색은 입지 않는다. 아마도 이건 엄마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옷을 깔끔하고 단정하고, 속된 말로 후리하지 않게 입혔다. 절대로 멋없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있는 집 자식은 아니더라도 없는 집 자식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엄마의 노력 덕분일까. 나는 부잣집 아이처럼 보인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나는 도저히 개발자 패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는 못 입어! 그렇다고 엄마가 좋아하는 단정한 스타일도 싫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옷을 사주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내가 돈을 벌어 내 돈으로 옷을 살 수 있게 된 뒤로 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나만의 스타일이라 함은.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네이비를 미친 듯이 좋아했는데. 이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라면 절대 입히지 않을 롱스커트를 사 입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스커트를 입었다. 위에는 깔끔한 하얀 셔츠를 입었다. 그렇게 입으면 근대 유럽 배경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느낌이 났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어딘가 우아해 보였다. 다른 사람 눈에도 내가 우아해 보이길 바랐다. 과연 그랬을지는 의문이지만. 계단을 올라갈 때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걸으면 나는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개발자는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회사에도 옷을 그렇게 입고 갔다. 하얀 셔츠, 네이비 롱스커트, 하얀 장목 양말, 검은 단화. 누가 보면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을지도. 좋아하는 옷을 입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행복이었다. 일을 하기 싫어질 때마다 절실히 깨달았다. 이건 행복이라고. 회사 가기 싫을 때도 예쁜 옷을 입기 위해 간다고 생각하면 힘이 났다.


그러다 회사에서도 스트레스받으면 옷을 주문했다. 나는 롱스커트 외에 다른 스타일을 도전했는데 최근에 도전한 건 ‘힙’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지그재그라는 쇼핑몰 앱에서 다양한 코디 사진을 보며 마음에 드는 코디에 찜을 눌렀다. 그 코디의 공통점은 크롭 기장의 상의, 허리까지 올라오는 하이웨스트 바지였다. 힙하고 다리가 길어 보이는 코디. 나는 다리가 길어 보이는 것에 로망이 있다. 내게는 키가 큰 여동생이 있는데 같은 옷을 입어도 여동생이 입었을 때 비율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나도 다리가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요즘 유행하는 크롭 상의와 하이웨스트 바지는 다리도 길어 보이는 데다가 힙하기까지 했다.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옷을 주문했다. 하루 걸러 하루마다 집으로 옷이 배송되자 여동생은 지그재그에서 협찬받았냐고 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현실은 백 퍼센트 내돈내산 (내 돈 내고 내가 산 거).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갔다.


여러 옷을 입어 보며 실패를 거듭한 끝에 내게 어울리는 코디를 찾아냈다. 하이웨스트 카고 바지 위에 흰 티를 입고 볼레로를 걸치는 것이었다. 볼레로는 팔과 어깨만 살짝 가리는 카디건이었다. 그렇게 입으면 상체는 여리여리하고 하체는 길어 보였다. 그렇게 입고 회사에 갔다. 왜 옷이 반쪽밖에 없냐는 말을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만족스러웠으니까.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있어서, 좋아하는 옷을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건 다 내가 개발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최대한 활용하는 거로 생각하련다. 개발로 받는 스트레스를 개발자가 가진 장점을 찾아서 해소하는 거라고.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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