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첫 번째,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영상 디자인을 전공했어도 UI/UX 디자인은 배운 적이 없고, 그 디자인학과마저도 중퇴했다. 내가 디자인할 수는 없다. 누군가 작업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두 번째,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자다. UI/UX 디자인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이 내 업무 중 하나다. 내가 일을 하려면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내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디자인의 꿈이 있다. 재능이 없음을 인정해서 도중에 그만뒀지만 취미로라도 디자인을 다시 하고픈 욕심이 있다. 그런 내게 디자이너와 협업할 수 있는 프론트엔드 개발자라는 직업의 만족도는 꽤 높다. 직접 디자인은 못 하지만 디자인을 구현해 내니까. 한마디로 대리만족이다.
나는 인턴 실습 때도, 첫 회사에서도 디자이너와 협업했다. UI/UX 디자인은 ‘이유 있음’의 미학이다. 색상, 폰트, 애니메이션 심지어 자간에도 모두 이유가 있다.
“이 컬러가 아니에요. primary color로 채워 주세요.”
“타이틀은 고딕으로, 본문은 셰리프로 해 주세요.”
“탭을 이동할 때 밑줄이 스르륵 움직이게 해 주세요.”
“지금 자간 적용 안 된 것 같은데 –1.4px로 조정해 주세요.”
개발자가 보면 ‘무슨 차이일까. 뭐가 그리 중요할까. 기능은 잘 동작하는데.’ 등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건 철저히 개발자 입장이다. 디자이너와 협업한다면 그 마인드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도 쌩신입일 때 개발자 입장에서만 생각하곤 했다. 쌩신입 개발자는 수없이 많은 지적과 수정 작업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디자인에는 이유가 있다.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받아들이자.’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똑같이 구현하는 개발자가 좋은 개발자다.’
큰 깨달음을 얻고 디자이너와 일하기 좋은 개발자가 될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데. 그랬는데.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더니 디자이너가 없는 것이다.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자인데 디자이너가 없었다. 그럼 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놀랍게도 디자인 업무를 내가 받게 되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일단 책임을 주면 뭐든 하게 되어 있다. 덕분에 디자인학과를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디자인을 공부했다. 디자인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는 건 예삿일이고 디자인 툴 강의를 듣고 다루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개발자인지 디자이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디자인학과 중퇴자 현 개발자가 갑자기 디자인을 독학한다고 서비스에 적용할 만한 UI/UX 디자인이 나올 리는 만무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고. 선배들은 ‘디자인? 나는 어떻게 되든 관심 없어.’라는 태도였고. 팀장님의 요구 사항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무엇보다 직업 만족도가 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프론트엔드 업무 중에서 기능 구현도 좋고, 백엔드와 통신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나는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일이 가장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못 하고 있으니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
‘더는 내가 못 해! 디자이너가 필요해!’
못 하겠어. 디자인도 못 하겠고 이대로는 개발도 못 하겠어. 결국 이직을 했다. 이직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디자이너의 존재 여부’였다. 면접 볼 때 항상 질문했다. ‘디자이너 있나요?’ 다행히도 나는 경력 있는 디자이너가 있는 회사로 이직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오랜 경력이 있는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귀중한 경험도 얻었다.
이직한 곳은 디자인 가이드가 잡혀있었다. 디자인 가이드는 디자인에 사용된 공통 패턴을 정리한 가이드인데,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작업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게는 일할 욕구가 샘솟는 환경이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주도해서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도 샘솟아 버린 모양이었다. 디자인 가이드를 기반으로 공통 컴포넌트 작업을 마치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분명 좋은 경험이자 포트폴리오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퇴사한 부분이 아쉽다.
이전 직장 생활을 돌아보았을 때 내게는 디자이너가 꼭 필요하다. 어떤 디자이너와 협업하게 될까? 어떤 디자인을 만나게 될까? 그걸 구현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