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무도 못 쓰는 페이지를 만든 거라고요. 이걸 작업하면서도 몰랐어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대표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페이지를 공들여 구현했으니. 이런 걸 자원 낭비라고 하는 거겠지. 스스로를 자책하며 앉아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온전히 내 잘못인가 의문이 들지만 그때의 나는 입사한 지 갓 한 달이 지난 사회초년생이었다. 다 내 잘못인가 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잔뜩 몸이 얼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다가 자리로 돌아와 눈물을 삼키는 게 고작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디자이너가 어떤 페이지를 디자인해서 내게 넘겨주었고 나는 그걸 작업했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니 사용자가 그 페이지에 도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표님은 어떻게 도달할 수도 없는 페이지를 의문도 가지지 않고 작업했냐고 화를 내신 것이고.
그래도 아무 생각이 없냐는 말은 심하지 않았나. 사회생활의 쓴맛을 일찍 경험했다고 생각해야지. 덕분에 다음 직장에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무던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겁먹지는 않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2년 차 개발자가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사건을 다시 바라보자. 이건 기획 문제다. 명확한 기획의 부재가 일으킨 사고라는 말이다. 기획이 명확해서 서비스에 대한 유스케이스와 유저 플로우가 견고히 자리 잡고 있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불필요한 페이지가 나오게 된 것도 별도의 기획자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 어째서인지 디자이너가 약간의 기획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때도 할 수 있었더라면 ‘아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따졌을 텐데. 제가 생각을 못 하긴 했는데요. 그러면 대표님이 기획을 확실하게 해 주셔야죠! 아니면 기획자를 뽑으시든가요! 패기 넘치는 신입이 될 기회를 놓쳤다.
기획이 없다면 개발자가 고려해야 할 범위는 어디까지 일지 고민이 된다. 제대로 된 기획이 없는데 그 상황에서 개발자는 어떻게 해야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니. 개발자가 원래 이런 건가….
왜 그런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그야 매번 겪어 왔으니까. 첫 번째 회사도, 두 번째 회사에서도. 혹시 제대로 된 기획이 있다는 건 교과서에만 나오는 이야기인가?
나는 시키는 걸 최선을 다해서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회사를 몇 번 옮기고 참여한 프로젝트가 늘어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기획이라는 설계도가 중요하다. 믿고 따라갈 길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다. 기획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는 프로젝트. 나 자신조차도 뭔지 모르는 환상의 그것.
적어도 주어진 일을 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냐는 말을 듣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런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