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만 있어 봐. 어디에서든 모셔가려고 하지.”
대학 다닐 때 교수님이 하신 말. 개인적으로는 개발자 시장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학벌 따지지 않고 실력만 있으면 몸값이 오르는 곳. 비전공자가 많이 도전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본다.
실력이 되면 그만큼 돈을 받는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돈을 받았으니 기대하는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 된다. 내가 세 번째로 취직했던 회사에서는 내 생각보다 높은 연봉을 받았다. 연봉 협상할 때는 좋았는데 다닐수록 불안해졌다. 내가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고 있을까?
회사에 다니고 연차가 쌓이면 연봉도 오른다. 연봉이 오르면 그 연봉에 상응하는 성과를 보여줘야 할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물경력이 된다. 연차와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경력. 개발자가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인 이유다. 금방 뒤처지고 물경력이 되어버리니까.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예상보다 높은 연봉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개발자 경력이 짧다는 이유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극복하느냐? 내가 찾아낸 방법은 없다. 계속 불안해하면서 불안감을 동력 삼아 발전하는 수밖에.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개발자라면 마음속 한구석에 짊어지고 있지 않을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불안감을.
개발자로 연봉을 받으며 회사에 남겠다면 불안감을 견뎌야 한다. 나는 견디지 못했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반은 자의였고, 나머지 반은 상황 탓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날 밤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정상 생활이 가능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그렇게 긴 병가는 내어줄 수 없다고 했고. 어차피 그만두려고도 했으니 내가 퇴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발목이 부러진 덕분에 꽤 긴 시간 개발을 하지 않았다. 개발 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다음 취직을 생각해 준비할 법도 한데. 몇 달이라는 시간을 누워서 보내며 해방감을 느꼈다. 지금은 쉬어도 된다. 나아가야 한다는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찾는 일이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본업이 아닌 말 그대로 ‘사이드’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수익을 내기보다는 포트폴리오를 채우기 위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개발은 하고 싶지만 회사에 들어갈 자신은 없어서 하려고 했다. 결국 구하지 못한 채 IT 출판사에 개발자가 아니라 편집자로 취직했다. 철저히 실력으로 평가받는 그 시장을 떠나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개발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회사에서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으니까. 편집자로 일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개발이 하고 싶어서.
나를 겁쟁이라고 불러도 좋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개발을 좋아하고 내가 만든 서비스를 사랑한다.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지도 않고 프리랜서 개발자로도 일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리고 기어이 개발자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