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 카후나의 난임 일기
특별한 용건 없이 서점에 가면, 꼭 하늘에서 내려준 것처럼 그 시절에 꼭 필요한 문장이나 책이 찾아오는 경험을 한다. 그날은 새로 생긴 서점에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평대에서 책을 집어 펼치자마자 이 문장을 만났다.
“하지만 그 위로 시간이 쌓인 겁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누군가는 적어서 남겨두고 누군가는 흘려보내는 바로 그 시간요. 시간이 쌓인 기록은 사실 그게 무엇이든 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이 나의 역사입니다.” 김신지 작가님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였다.
그날부터 시술 내용을 기록했다. 원무과에서 의무 기록 떼면 다 나와 있는 걸 뭐 하러 기록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뭐든 적으면 불안감이 낮아 지는 것을 경험하고 더 성실하게 쓰고 또 썼다. 정리한 것들은 이런 것이었다.
- 날짜, 병원 진료 여부
- 주사 종류 및 용량
- 증상(두통, 왼쪽 난소 부분 불편감, 메스꺼움 등)
- 초음파 결과: 난포 개수, 내막 두께
- 이벤트: 난자 채취 날짜, 채취한 난자 개수, 수정란 개수, 이식 여부, 난소 물혹 유
이렇게 시술 내용을 기록하니 내가 받는 의료 서비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주치의만큼 전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라도, 내 몸에 투약하는 약 이름, 용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3차를 준비하면서 그간 받은 시술 기록 엑셀 파일을 열었다. 별생각 없이 보다가, 내 인생 반년을 돌려받았다. 총 79행에 그간의 노력이 오롯이 적혀 있었다. 전력으로 뛰었는데 그게 제자리 뛰기였다 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황당한 기분이었는데, 기록을 보며 내가 느낌 패패감을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한 행 한 행 기록을 보며 그간의 기억이 실감 나게 떠올랐다. 1차에 어설프게 주사를 놓다가 피가 나서 당황했던 날부터, 2차에 배아를 이식하고 임신할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떤 것까지.「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김신지 작가님이 했던 그 말이 맞았다. 기록해 둔 시간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낱알처럼 살아 있었다.
기록한 내용이 쌓이니, 모르던 패턴도 보였다. 채취 날짜가 생리 시작일로부터 D+13일로 일정했다. 물론 주사 반응에 따라 다음 차수 언제라도 변화할 수 있지만, 참고할 수 있는 나만의 패턴을 알 게 되니 안심이 되었다. 내 몸과 잘 맞는 과배란 주사약도 보였다. 메노푸어라는 약을 주사했을 때 난포가 고르게 잘 자랐다. 이 점을 주치의 선생님께 말씀드려 처방에 반영했다.
이런 것들은 누가 따로 챙겨 주지 않는다. 주치의도 환자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세한 기록을 다 살필 수 없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만큼 스스로 시술 내용을 기록을 하니 내 시험관에 대한 숙지가 저절로 되었다.
시술 기록과 함께 감정도 기록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난임 일기를 썼고, 감정을 정량화해서 기록 했다. 난임 일기엔 마음을 두서없이, 남김없이 적었 다. 말하자면 하소연, 살풀이였다. 난자 채취하기 전 날 떨리는 마음을 정리하기도 했고, 남편과 싸웠 을 때도 무작정 백지에 내 마음을 쏟아냈다. 문장으로 쓴 감정은 마음속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뒤틀린 마음에 언어화하며 이성적 논리가 깃들었다. 일기를 쓰자마자 스스로 읽으면서, 와, 이건 정말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적이 많았다.
4년간 기록한 내 난임 기록. 시험관 1차 시작일이 엑셀 파일 1행이었다. 마지막 기록은 814번째 행 출산에서 끝났다. 첫 과배란 주사의 멍 자국부터 분만실의 아기 울음소리까지 난임 여정이 그곳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정리한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 난자 채취: 총 10번
- 채취한 난자: 총 68개
- 평균 수정률: 47%
- 총 이식한 횟수: 5회
- 5일 배양 배아 합계: 7개
뭐 하러 힘들게 그걸 다 적고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열렬하게 기록한다고 임신이 되는 것도, 난자가 더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간다면 더 열심히 기록할 거라고 큰소리로 답하겠다. 그게 아니었으면 훨씬 그 시간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을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