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 카후나의 난임일기
나만 빼고 모두가 임신하는 것 같았다. 길에선 임신한 사람만 보였고, 티브이를 틀면 육아 예능만 나왔다.
난임 시술을 받다 보면 임신에 혈안이 되고, 일상이 시험관으로 뒤덮인다. 자칫 거기에만 빠져 있으면 우울로 직진하는 길이라 환기가 필요하다. 인생에는 시험관 말고 다른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려줄 장치가 있어야 한다.
나에겐 그게 책이었다. 난임 시작 전의 나는 먹고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경영서를 일 년에 한두 권 사는 사람이었다. 그조차 완독하는 일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난임 기간을 통과하며 일주일에 한 권 이상 ‘읽는 사람’이 되었다. 책에 밑줄 긋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난임 라이프를 시작하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인 외로움도 책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친구들과 만나 웃으면서 수다 떨 자신이 없었고, 가식적인 대화는 지루해 견디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피했다. 혼자가 된 나에게 책은 속 깊고 재미난 친구가 되어주었다.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책의 도움을 받았다. 난임 병원 대기실에서. 아무리 적게 기다려도 한 시간이 기본인 대기 시간. 시간도 문제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이 시간에 쌓이는 불안이다. 대기실 의자에서 대책 없이 앉아,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술술 쓰던 내가 책 한 권만 있으면 이 시간이 무섭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덕분에 병원에 다녀오며 겪는 타격이 대폭 줄었다. 오전에 난임 병원에 다녀오면 하루 종일 우울했는데, 책을 들고 다니기 시작하자 전과 달라졌다. 불안이 파고들 틈이 줄었다.
몸은 난임병원 2층 초음파실 대기실에 30명의 여성들 사이에 있지만, 마음은 책을 타고 날아 알래스카 절벽 끝에서 수만 마리의 순록의 이동을 보 기도 하고 (호시노 미치오, 「긴 여행의 도중」), 교토 철학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한수희, 「아주 어른스 러운 산책」).
책의 가장 큰 효능은 삶이 내 이야기로만 가득 차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슬픈 일도, 가슴 벅차게 행복한 일도.’ 이렇게 혼자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의 세계는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는 곳이었다. 나처럼 빨리 싫증 내는 인간에게 새로움이 무한으로 터지는 곳을 발견한 것은 구원 그 자체였다. 매일 수십 차례 이상 신선한 생각과 통쾌한 표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기대할 것 없는 일상에 설렘이 넘실거렸다.
난임 생활 동안 초긴장 신경질적 지옥에 빠질 때마다 에세이를 찾아 읽었다. 좋은 에세이를 읽으 면 얼어붙은 마음이 봄비를 맞은 것처럼 부드러워 졌다.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것까지 둘 다 중요하다는 것. 대세에 지장을 주는 ‘큰 삶’만 잘 살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순간의 기쁨, 일상의 빛나는 순간인 ‘작은 삶’ 도 촘촘히 챙겨야 한다는 걸. 먹고사는 일에 과기능 상태로 살던 나는 이걸 너무 늦게 알았다.
난임 기간 동안 가장 많이 펴 본 책은 「기다림이 평화로울 때」(앨리스 D. 도마)이다. 난임 분야 마음 전문가의 책이라 더 신뢰할 수 있었다. 난임 동료/ 지지그룹의 중요성부터 이완훈련 방법, 남편과 잘 지내는 전략까지 알려주어 자주 펼쳐 보았다. 결정 적으로 ‘내가 빠져 있는 위기가 무엇이지?’, ‘이렇게 마음이 힘든 것은 당연하구나’와 같은 객관적인 시선을 제공해 준 고마운 책이다.
돌아보니, 시험관 세계의 진정한 능력은 누가 성숙 난자가 많이 나오냐, 이런 ‘몸‘의 영역이 아니었다. 누가 얼마나 오래 버티나, 실패한 차수에서 어떻게 회복하고 다시 도전하나와 같은 ‘마음’의 영역이었다. 책은 내가 시험관만 바라보지 않도록 건강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고마운 장치였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그 기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