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난임 커뮤 - 설국의 난임일기
몇 번째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어느덧 10번째 이식을 앞두고 있다. 예전엔 채취도 이식도 몇 차례인지 바로바로 기억해내곤 했는데, 요즘엔 메모장을 뒤적여야 겨우 확인할 수 있다.
일주일 뒤면, 지난 두 차례의 채취를 거쳐 얻은 동결 배아 4개 중 2개를 이식한다. 배아 등급은 ‘중급’. 주치의 선생님이 기대하는 ‘상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쉽진 않다. 배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배아 등급이 높을수록 임신 성공률이 높다고들 하지만, 등급이 좋다고 반드시 착상이 되는 것도, 등급이 낮다고 해서 건강한 아이를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배아 등급에 집중했는데 작년 배아 연구원과의 대화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난임 가족 연합회에서 열린 특강이었다. 배양실 연구원장께 직접 질문할 기회가 생겼다. ‘이보다 더 예쁠 수는 없을 최상급 배아가 나왔는데, 왜 착상이 되지 않는 걸까?’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돌아온 답변은, 배아의 외형 등급과는 별개로 염색체에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병원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배아 등급은 주로 모양에 따라 결정되고, 대부분 육안으로 연구원이 판단한다.
외형이 좋다고 해서 염색체나 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대로 해석하면 외형이 못생겼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심각한 난저라 1년 만에 겨우 난자 한 개를 채취했고 어렵게 수정에 성공했지만 등급은 매우 떨어진다는 배아 하나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이식을 했는데 무사히 출산까지 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그 기적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
인생의 많은 일이 그렇듯, 임신과 출산 또한 먼저 마음 먹었다고 해서 빨리 도착하는 세계가 아니다. 오랜 딩크를 졸업하고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을 무렵, 40대에 결혼을 하고 가능한 한 시험관을 시작해야겠다던 친구가 있었다. 그로부터 반 년 뒤 친구는 자연임신으로 첫 아이를 품었고, 2년 뒤엔 둘째까지 임신했다. 여전히 새 식구를 맞이하지 못했기에 난 무지막지하게 부러웠다. 내가 먼저였는데, 왜 나는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도 마음 한 켠이 서러웠던 날도 있었다.
어느 새벽,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기로 한 수술 예정일보다 일주일 앞선 시점이었는데, 잠자리에 들기 직전, 갑자기 양수가 터져 구급차를 타야 한다며 당장 병원에 동행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코로나가 한창 확산되던 시기였다. 고향에 계신 친정어머니는 마침 코로나에 걸리셔서 운신이 어려웠고, 남편은 첫째 아이를 돌봐야 하는 처지라 동행하기 어려운 상황.
결국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나뿐이었고, 여태 친구에게 고백한 적 없지만, 당시 나는 과배란 중이었다. 보호자로 동행했다가 혹시 코로나에 감염이 되거나 다른 보호자와 와주지 않을 경우 채취가 취소될 수도 있었지만, 주저할 틈이 없었다. 앞뒤 잴 틈 없이 친구에게로 달려가야 했다.
정신없이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진통에 괴로워하는 친구를 수술실로 보낸 뒤에야, 미처 챙겨오지 못한 과배란 주사와 약에 대한 미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30분이면 끝날 거라던 수술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안에서는 어떤 소식이 없었다. 친구에 대한 걱정이 커져만 가는 가운데, 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기실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수술실 앞을 오가며 시계 태엽처럼 왔다갔다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고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나타났다. 그렇게 나는 친구 부부보다 먼저, 갓 태어난 아기를 마주했다. 아직 씻기지 않아, 붉은 얼굴에는 하얀 태가 묻고 양수에 불어 쭈글쭈글한데도, 어디 하나 손댈 것 없이 완벽해 보였다. 2.8kg의 작은 존재가 뿜어내는 생명의 감동에 사로잡혀, 스스로 측은해하던 처지는 이미 잊혀졌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 누워있던 친구에게 아기 사진을 보여주며 뭉클해하자, 친구는 내가 낳은 아이는 얼마나 더 사랑스럽겠냐며 사진 속 아기가 아닌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안쓰러움. 까만 눈동자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도 시험관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그날 새벽을 떠올릴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감격스러진다. 그때 나는 ‘내 아이를 만나는 기쁨을 미리 체험했다.’고 믿는다. 상상만 하던 순간을 직접 목격하고 느끼며, 괴로워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아이를 만나고 싶어졌으니까. 이전보다 더 고대하게 됐으니까.
시험관을 하다 보면 수많은 숫자와 마주한다. 나이, 채취 횟수, 이식 차수, 배아 개수, 배양 기간 등. 하지만 그 어떤 숫자도 ‘내 차례’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순서를 알려주는 대기표는 없지만, ,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온다는 믿음은 굳건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치 선물처럼 내게도 불쑥 그 순간이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매 순간 나를 믿고 함께 기다려주는 이들과 설렘을 간직한 채 조심스레 다른 세상을 준비한다. 다시 너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