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 설국의 난임일기
요즘 나는 불량 학생과 다를 바 없이 지낸다. 낯선 분야의 기간제 사무직으로 일하게 되면서 생긴 변화다. 최근 몇 년 다닌 헬스장과 멀어졌고, 업무 집중력을 높여보겠다는 핑계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러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사서 출근한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늦어졌고, 알람 맞춰 하루에 몇 번씩 챙기던 영양제도 대폭 줄었다.
임신을 포기해서가 아니다. 그간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들은 웬만큼 다 해봤다.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판단해서다. 오늘을 즐기며 내일 올 아이를 기다리는 것, 몽글몽글한 첫 만남의 순간을 상상하며 매일매일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일상은 온통 시험관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일하면서 난임 병원에 다니며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몸이 편안해야 임신이 잘 된다는 주변의 권유를 듣고 오래 다닌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었다. 병원에서는 매번 난자 질이 좋지 않거나 임신 유지가 어렵다고 하길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러닝머신 위에서 땀날 때까지 걸었다. 꾸준한 운동이 난자 질을 높이고 자궁 내 혈류를 증가시켜 착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잔씩 물 마시듯 들이켰던 커피도 끊었다. 술은 이식에 실패하거나 시험관을 쉬는 기간이 아니고서는 엄격히 자제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해서 밤 10시면 졸리지 않아도 누워 눈을 감았다. 난자 질을 올려준다는 영양제 해외 직구도 불사했고, 좋다는 영양제는 다 샀더니,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한동안 영양제를 한 움큼씩 쥐어 먹곤 했다.
하라는 건 또 얼마나 군말 없이 잘 따르는지. 생리 주기에 따라 병원에 가서 난포 상태와 내막 두께 등 자궁 상태를 살피고, 새로운 주기를 시작하거나 마감했다. 병원에 시키는 대로 오라면 가고, 주사를 맞으라면 맞고 먹으라는 약도 꼬박꼬박 챙겼다. 주치의가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고 집에 오면 어려운 의학 용어를 찾아가며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엄마 아빠 말도 한 귀로 흘려듣던 내가, 단 한 번도 스스로 알아서 책상 앞에 앉은 적이 없던 내가 시험관에 있어서만큼은 모범생이었다. 그만큼 간절했고 노력한 만큼 결과도 부응해 주리라 믿었기에 기꺼이 주어진 상황에 뛰어들었다.
내가 특별히 유별난 게 아니다. 아기를 기다리는 예비 엄마 아빠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된다. 가능한 한 빨리 건강한 아기를 만나기 위해 내 몸 상태를 끌어올리고, 이것저것 좋다는 데에는 뭐든 기대어 본다. 이걸 먹었더니 시험관을 쉬는 동안 아이가 생겼다는 성공 후기를 보고 맛이 기가 막힌(?) 마녀 수프도 만들어 먹고, 평생 입에도 안 대던 추어탕도 착상에 좋대서 챙겨 먹었다. 애 잘 낳는 사람의 속옷을 빌려 입으면 금방 임신이 된다는 말이 진지하게 들린 적도 있다.
‘이 영양제를 먹으면 도움이 될지’, ‘이 운동을 하면 어떨지’, ‘장기요법에서 단기요법으로 바꾸면 어떨지’, ‘PGT를 해야 할지’ 혹은 ‘PGT를 그만해야 할지’, ‘병원을 바꿔야 할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을 때는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우연의 일치라고 할지라도 1%, 아니 0.00000000001%의 확률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는 않았으면 한다. 한 번에 여러 종류의 영양제를 복용할 경우 간에 무리가 갈 수 있고, 과한 운동은 오히려 난자 질을 떨어뜨린다. 전원을 고려하는 것도 주치의가 내 몸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프로토콜을 찾아내기까지 적어도 3번 정도는 함께 시험관을 시도한 뒤에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PGT는 선택의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논외로 둔다. (할말하않)
간혹 채취나 이식 결과나 좋지 않거나 임신 유지가 되지 않아 ‘시험관을 한다고, 혹은 같은 시도를 반복한다고 해서 희망이 있긴 할까?’라고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과 기대는 우리를 만나러 오는 아가를 한 걸음 앞서 마중하게 한다. 그러니 ‘희망’에 ‘고문’이라는 단어를 붙여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다.
희망을 희망하는 우리는 ‘내려놓으면 되더라’, ‘마음을 비워야 오더라’는 위로에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기꺼이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 두드려보고, 안 되면 방향을 수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지금의 나처럼 ‘불량한 길’을 선택했다 해도 죄책감은 갖지 않길. 나답지 않은 걸 하면 몸도 긴장하니, 마음이 편한 대로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임신에 한 발짝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닐까? 우리가 한 어떤 선택도 틀릴 리 없다. 어느 방향으로 길을 내든 목적지는 같다. 우리는 매일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토록 안아주고 싶은 아이를 데리러 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