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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어땠을까? 내내 딩크로 지냈더라면?

오케이키 설국의 난임 일기

by 오케이키 Okeiki

21번째 채취 끝에 배아 2개를 동결했다. 정부 지원 차수를 소진하고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난임부부시술비지원금으로만 진행한 차수였다. 습관처럼 들른 원무과에서 약 170만원의 결제 비용을 언급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PGT를 하는 동안에는 검사비에 배아 동결 비용까지 이것저것 합치면 한 번에 300만원 넘게 결제한 적도 있는데, 이 정도 금액쯤이야.

나이와 시술 횟수, 병원비. 해마다, 차수마다 쌓여가는 숫자들이 피부로 와닿는다. 나는 지금 ‘제법 꽉 들어찬’ 고차수를 지나고 있다.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만약 우리가 내내 딩크로 지냈더라면 어땠을까. 부모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면, 우리 두 사람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을까. ‘만약’이라는 마법을 빌려,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시험관 하느라 들인 비용을 모았으면 중형차 한 대 정도는 샀겠다’던 누군가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진료비, 약값, 검사비, 이식비, 배아 동결비까지 다하면, 매번 적지 않은 금액이 된다. 예전의 우리라면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주말마다 나들이를 가고, 계절마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갓 구운 호떡이나 설탕 가루 솔솔 뿌린 꽈배기를 오물거리며 시골 오일장을 돌아다니고, 벚꽃이 피는 시기엔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떠나곤 했던 그 시절처럼. 아마도 충분히 행복했을 테다.


일상 역시 더 단순했을 것이다. 병원 예약을 할 필요도, 영양제를 챙길 필요도, 주사를 맞을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마음 가는 대로 보통의 날을 보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천천히 눈을 뜨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유쾌하게 게으름을 부리는 날. 오래 전 좋아하던 음악을 따라 부르고, 밀린 드라마를 몰아보며 늦은 밤까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뜬금없이 당기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며 자동차를 타고 몇 시간씩 달리기도 했을 날들. 그 모든 시간이 여유롭고, 평화롭고,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했을 가능성. 단순한 위안이 아닌 진심으로 그럴 수 있었던 삶의 가능성이다. 아이 없이 둘만 있어도, 우리는 언제나 순간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부모가 되기를 꿈꾸기 전의 삶이 그립지는 않다. 누군가는 아이 없는 삶을 결핍이라고 여기지만 결핍은 타인의 기준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어떻게 느끼느냐다. 정해진 공식도 정답도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선택하고 책임지고, 다시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부모가 되기로 결심한 우리도, 아이 없이 둘이서만 살기로 했던 우리도 결국엔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나와 당신, 우리 둘만이 함께 열어가는 작고도 찬란한 일상, 그것이 바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형태의 행복이다.


물론 항상 평온했던 건 아니다. 아이를 낳자고 마음 먹고 시험관을 진행하는 동안 때론 너무나 잘 안다고 자신했던 배우자에게서 낯선 모습을 맞닥뜨리기도 했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좋다는 건 다 시도해보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애태우던 나와 달리 남편은 한 발짝 물러선 채로 조용히 인내했다. 서로 다른 표현과 해결 방식이 불씨가 되어 오해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묵은 감정이 쌓여 봇물 터지듯 흘러 넘칠 때도 있었다. 그런 때면 어김없이 복기하듯 각자 ‘그때의 나’를 설명했다. 상대방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대도 최선을 다해 얘기했고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랬구나’


대화의 마지막은 어김없이 이 짧은 문장으로 끝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험관을 하면서 머리를 맞대어 문제를 해결하고 고민하고 더욱 깊이 대화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나 자신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 우리는 더욱 단단하게 둘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영영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더라도(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나겠지만), 결코 우리는 둘이었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아이는 우리에게 오기 전부터 두 사람을 강하고 성숙하게 만들어줬다. 파도가 쓸고 간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조개껍질처럼 뜻밖에도 우리는 좀더 가까워졌고 나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너그러워졌다. 나란히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도 참 괜찮은 하루였다고 말하며 솔솔 늙어가는 삶. 그것이 얼마나 다정한지 우리는 난임이라는 과정을 통해 알게 됐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 것이었다. 우리는 매순간 가장 좋은 것을 쥐고 씩씩하게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래서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어떤 날이든 우리에겐 소중했고,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다. 항상 기특하게 잘해왔던 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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