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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미 널 사랑하고 있어

오케이키 - 설국의 난임 일기

by 오케이키 Okeiki

1년 전 봄, 한 난임 단체에서 진행하는 난임 부부 건강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오리엔테이션 당일 행사가 열리는 난임병원을 견학할 기회가 생겼다. 대기실과 진료실, 채취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양실 일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눈 마주치기조차 영 어색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다는 진료 대기실의 1인 의자, 환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평화로운 기다림을 응원하는 듯한 밝은 회복실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냉동배아들을 보관하는 방이었다.



우리들에게는 출입제한구역으로 존재했던, 평소에는 절대 넘어갈 수 없던 그 문이 열렸다. 하얗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3~4개의 냉동 탱크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휑할 법도 한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아늑해 보였다. 탱크는 예상보다 작았다. 두 팔을 벌리면 품에 안길 법한 그 작은 탱크 안에 수천, 수만 개의 배아들이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린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장소에 온 것이다.


탄생의 순간을 기다리는 수많은 배아들이 언젠가 첫 울음을 터트리는 갓난아기가 되고 배밀이를 하고 걸음마를 배우고 감정을 표현하며 성장할 모습을 상상하니, 그 작디 작은 배아들 하나하나가 대견하고 기특했다. 딸이든 아들이든, 아빠를 닮든 엄마를 닮든, 힘이 세든 호기심이 많든, 상관없었다. 그저 무사히 엄마 아빠 품에 달려와 안겨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무럭무럭 자라나기만 빌었다.


함께 있던 다른 부부들의 감정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연구소 복도에 서서 배양실 최고 책임자께 난자질과 정자질이 좋아지는 방법, 개인 사정으로 난자 채취보다 이르게 정자 채취를 해야 할 때의 영향, 좋은 난자와 정자의 선별 방법, 배아 등급 등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던지며 답을 듣는 동안에도 눈길은 자연스레 몇 번씩 탱크 쪽으로 향했다. 저 안에 우리의 아기가 될 배아가 있는 것처럼 자꾸자꾸 보고 싶고 애틋했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나 보다. 전형적인 T 성향인 남편은 시험관을 시작하고서 감성이 풍부해졌다. 내가 품은 배아가 3일 배아인지 5일 배아인지, 그래서 착상은 언제 한다는 건지 분주하게 온갖 정보를 뒤지는 사이, 남편은 이식 당일 병원에서 받아온 배아 사진을 애틋하게 들여다본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그렇게 좋아?”


남편은 여전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이게 너였어.”


아가가 태어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내게는 그 말이 ‘아빠는 널 만나기 훨씬 전부터 널 사랑했어.’라고 들렸다. 남편의 말에는 단순히 배아를 향한 기대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희망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식을 할 때마다 우린 부모가 된 것과 다름없었다. 예쁜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동글동글한 생각만 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중에 흠없고 완전한 것만 주고 싶었다. 그 사랑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그 변화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가득 채운다. 씨앗보다도 작디 작은 존재가 내 안에서 자리를 틀고 세상에 나와 자기만의 감정을 갖고 표현할 줄 아는 어엿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다는 것. 언젠가 우리와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한없이 경이롭고 신기하다.


만약에 이식을 앞둔 누군가가 있다면 배아 사진은 꼭 간직했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내 아이의 가장 어린 모습은 대계 초음파를 보는 순간이겠지만(아마도 임신 5~6주), 우리는 그보다 훨씬 앞선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은 배아가 혹은 언젠가 우리의 아기가 될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존재를 향해 솟아오르는 마음만큼은 확실히 지금 여기서부터 존재한다.


다음 차수는 담당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다시 채취를 할지 우리 뜻대로 이식을 할지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시기의 차이일 뿐 머지 않아 이식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때가 오면 우리의 배아 아니 우리의 아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엄마 아빠는 이미 널 사랑한다고. 그러니 곧 만나자고. 이번에 그 만남이 성취될지 알 길이 없지만, 우리는 그 존재가 ‘안녕, 나였어’라고 달려와주길 기대하며 마중을 나간다. 그것은 단순히 아이를 갖는 것 이상의 의미, 나와 남편이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우리라는 미래가 담긴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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