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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또 다른 기다림

오케이키 - 설국의 난임 일기

by 오케이키 Okeiki

시험관은 기다림을 배우는 과정이다. 매달 생리 주기에 맞춰 몸 상태를 체크하고, 주치의의 판단에 따라 채취와 이식 날짜가 정해진다. 이식 후엔 일반적으로 10일 뒤에 있을 임신 반응 검사 날짜만 바라보느라 시간이 더디게 간다. 임신에 성공하면 한 단계 전진, 실패하면 처음으로 돌아와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어떤 일은 반복될수록 무뎌지고 때론 대범해지는 반면 난임에서 겪는 실패는 단단했던 심장도 흐물거리게 한다. 점점 유리 심장이 되고 만다.


친한 친구와 가족, 심지어 배우자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기가 두려웠다. 누구도 구체적인 내 생활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 여겼고, 실제로 그랬다. 나를 겨냥한 게 아닌데도 뒤돌아 상처받았고, 비슷한 일이 재현될수록 난임에 관한 어떤 이야기든 버거웠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는지 원망하고 좌절했던 날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감정 속으로 파고들었다. 홀로 많은 것을 참아왔던 것이다.



사람을 만나려면 전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한 번은 반 년 만에야 친한 친구와 만날 수 있었다. 그 날 우리는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철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난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와 이 주제로 이야기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쌓아 두었던 감정이 밀려올까 두려워 꼭 잠가놓았던 나의 이야기. 그런데 그날은 내가 먼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동안의 과정을 두서없이 읊었다. 시험관 시술을 받으며 겪은 고통과 그로 인한 마음의 어려움,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털어놓았다. 묻어뒀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내내 집중하며 내가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는 듯한 눈빛을 보내던 친구는 이야기가 멈추자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먼저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늘 너를 위해 기도했어."


그 말 한 마디에 내 가슴이 일렁였다. 그동안 나는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힘든 사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고, 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지레짐작하며 자진해서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뒤에는 나를 걱정하고 아끼고 내 바람이 이뤄지길 함께 빌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최고의 응원은 말 없이 곁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걸. 비록 잠시 멀어지더라도 다시 돌아오리라 믿으며 자신에게 올 행운까지 보태서 줄곧 이쪽으로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태양은 뜨겁지만 햇살은 따뜻하다. 그래서 내 곁의 온기를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다. 가슴 시리고 홀로 외로울 때처럼. 사실 난임을 겪으며 많은 이들이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고 여기지만, 소리 없이 다가와 언제든 내 짐을 기꺼이 들어주겠노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내 것과는 다른 의미의 기다림.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바닥을 짚고 주저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너를 위해 기도했어." 그때 친구가 내게 건넨 말은 다시 나를 세상과 연결해준 한 줄기 햇살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난임은 약점도 부끄러울 일도 아닌 그저 지금 겪고 있는 과정일 뿐이니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나의 상황을 알려(?)준다. 사랑이 있는 호기심에는 친절히 답하고, 배려 없는 조언이나 의견은 웃으며 차단한다.


삶의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내게 난임은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는 기다림을 경험하게 했고, 예전에는 몰랐던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했다.


난임을 계기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을 배웠다. 우선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면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들어주기. 상대가 이야기하는 동안 어떤 얘기를 할지 고민하느라 내게 보내는 신호를 놓치지 말고 꽉 잡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 인연의 끈이 더 단단해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특정 주제를 피하고 숨기는 눈치라면 파고들지 말고 기다려주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준다는 건 믿는다는 뜻. 마구 헤매고 방황하고 넘어져도 끝내는 나라는 위안을 떠올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그런 시간도 필요하다. 잠깐 멀어진 듯 보여도 우린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큰 의미이니까. 내 곁에 스미는 햇살의 온기를 모르고 지나쳐도 햇살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이제는 난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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