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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너와의 거리, 나와의 거리

오케이키 - 설국의 난임 일기

by 오케이키 Okeiki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그러다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그때 나에게 맞는 적정선을 찾고자 노력했다. 시험관이라는 길목을 통과하며 변화해온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 말이다.

남들에게는 수월해 보이기만 하는 임신과 출산이 나에게는 닿을 수 없는 산처럼 높다. 처음 몇 번은 뭣도 모르고 긍정적이었다. 나도 조만간 저들처럼 내 안에 생명을 품고, 달이 차오른 뒤엔 기다리던 아이를 만나고 버거운 육아에 쫓기다가도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행복에 잠기리라고. 그 달콤한 상상이 일상에 활기를 더한다.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도 있다. 강한 척 괜찮은 척하다가도 불쑥 내 안의 못난 모습이 얼굴을 내민다. 나보다 늦게 임신을 계획했거나 혹은 아예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금세 임밍아웃(임신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일)을 했을 때, 만삭의 몸으로 걸어가는 임산부를 마주치거나 횡단보도 앞에서 나란히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아기와 엄마를 볼 때. 심지어 생판 남도 아닌 내 인생의 단짝 친구의 임신 소식에도 축하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속으로는 미칠 듯이 질투가 났다.


결혼한 지 8년 만에 기적적으로 임신한 지인이 조심스레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을 때에는 유독 괴로웠다. 그나마 메신저상으로 오가는 대화라 다행이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거나 통화를 했더라면 분명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꼈을 게다. 우리 부부가 몇 년 전 딩크족을 졸업하고 부모가 되겠노라 선언을 했었던 터라 우리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될지 한참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미안해’. 본인들에게는 기적 같은 축복이 찾아왔는데, 오히려 사과하는 지인을 보며 서운한 감정조차 가질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축하의 말, 그리고 무탈하게 건강하게 만나길 빈다는 응원이었다.


우리도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임신이 되었었나 보다. 그러나 나는 임신 8주 차에 계류유산으로 뱃속 아가를 보낸 직후였고, 지인의 아가는 무사히 안정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지인에게 당시 유산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이 일을 안다면 그 지인은 분명 자신을 탓하며 평생 내게 미안해할 착한 사람이니까.


그 후로 얼마간은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받을 상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인간관계에 있어 거리를 두어야 했다. 힘낼 힘조차 없을 때 힘내라는 위로는 폭력과도 같다. 난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공감할 수 없는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이 있고, 난임을 겪었더라도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 만큼 온전한 이해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런 면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사실 혼자가 되어도 괜찮다. 유별나다거나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진심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든 나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 준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무사히 이겨내고 돌아오기를 빌어준다. 그러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데 너그러워졌으면 싶다.


실패에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안과 두려움, 예민함, 질투처럼 나답지 않다 여겼던 감정들이 차오르는 건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고 진심을 다했으니까. 그러니 그런 감정들도 어찌 보면 예쁘다. 다만 흘려보내야 할 감정들에 너무 붙들려 있어선 곤란하다. 빈자리가 생겨야 희망도 차오르는 법이니까.


때때로 감정의 침체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만의 비법을 꺼낸다. ‘평생 난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해질 땐 ‘나 불안하네’라고 다른 사람 얘기하듯 해당 감정에 대해 딱 그 정도로만 규정한다. 누군가 자기 딴에는 도움을 주겠다며 임신 잘 되는 비법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면 ‘지금 이 상황 불편하네’라고 자각하고는,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답하며 그 자리를 벗어난다.


등급 좋은 배아를 이식했는데도 착상 수치조차 나오지 않고 다음에 또 실패할까 무서워지면 ‘이번에는 안 됐네. 다음에 잘 되면 되지’라고 말하고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쭈욱 들이킨다. 병원 가기 무섭다던 지인이 의외로 시험관 도전 한 번에 임신을 했을 땐 ‘부럽네’라고 말한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내 감정과도 거리를 두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영 통하지 않는 때가 온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나름 유효하다.


주문처럼 하는 말. 내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아직 아이가 오지 않은 지금도 그렇다. 꼭 난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힘든 순간은 오고, 또 지나간다. 조금이라도 유연하게 그 시기를 지내게 해주는 지혜는 내 안에 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나야말로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장 잘 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만큼만이라도 나를 아끼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만큼 자신에게 너그러워져도 괜찮다. 아이를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린 한껏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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