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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아이보다 더 귀하다

오케이키 설국의 난임일기

by 오케이키 Okeiki

PGT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데, 그땐 그러지 못했다. PGT를 해보자고 결정했을 때만 해도 과연 검사를 보낼 만한 5일 배아가 나올지 걱정이었다. 첫 차수를 제외하고는 앞서 3번의 채취를 하는 동안 항상 배아 질이 좋지 않아 가까스로 3일을 버텨준 배아가 1~3개뿐이었으니까.

(PGT는 3일 배양 배아로도 검사가 가능하지만 보다 정확한 검사 결과를 위해 5일 배양 배아를 우선한다.)


PGT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몸도 반응한걸까. 당시 활동하던 오픈채팅방은 한동안 각종영양제 정보로 뜨거웠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때 귀동냥으로 들은 영양제(유비퀸놀)를 챙겨 먹은 지 처음으로 7개의 5일 배아가 나왔다(지금은 영양제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보고 있다). 내게서도 5일 배아가 나올 수 있다니, 그 차수에서 500만원 넘는 카드값을 결제하면서도 근간에 정상 배아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차츰 개수가 줄기는 했어도 그 후로도 꾸준히 5일 배아가 나와 준 덕에 2년간 PGT를 할 수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건 불통이라는 지점에 번번이 가로막혀 되돌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 의지라곤 도통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벗어나 남편과 바다를 보러 떠났다. 가족과 여름휴가를 즐겼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헬스장 이용권도 연장하지 않았다. 금기시하던 와인과 맥주를 실컷 마셨고, 남편은 출산 뒤에 하자던 하지정맥류와 비염 수술을 감행했다. 예정된 진료일을 넘길 때만 해도 어쩌면 이번이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버리는 게 아닐까 했던 초조함은,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옅어졌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하루 빨리 임신해야 한다며 식단, 운동, 주사에 매달렸던 강박을 접고 나니, 남편과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되돌려 받았다.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실패했다고 단정 지었던 인생에도, 행복은 있었다.


한창 신나게 나의 삶에 집중하고 살다 보니, 무척이나 뜬금없이 “다시 병원에 가볼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6개월 만에 병원을 찾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 조금은 쑥스럽고 민망해서 ‘안녕하세요’ 대신 ‘너무 오랜만이죠’라는 인사말을 건넸다. 주치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호쾌하게 답했다. 부드러운 눈빛은 나를 향해 ‘나(주치의)를 믿고 다시 일어나주길 기다렸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각종 호르몬제와 시술에 지쳤던 몸이 건강해진 걸까, 덜 아문 상처 위로 묻어두고 굳어졌던 마음이 새로운 희망으로 말랑말랑해져서일까. 스포일러를 하자면 휴식기 이후 첫 차수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통배를 만났다.


공백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두려웠지만, 시험관을 시술을 하지 않은 6개월 동안 어떤 별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 때가 바로 쉼이 필요한 때이다. 고된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정작 나 자신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거나 내가 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여기까지 왔다는 신호니까. 인생 전반을 두고 보면 몇 개월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순간이다. (때론 1년이 넘는 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임신한다고 해도 그 아이가 자라 부모의 품을 떠날 때까지 함께 할 시간은 훨씬 길다.


그러니 지금은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대도, 다음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만큼 진절머리가 난대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아이보다 더 귀하다. 진작부터 내 곁을 지켜준 남편, 가족과 친구들이 지금 더 소중하다. 언젠가 선물처럼 와줄 아이와의 삶도 물론 가치있겠지만, 바로 이 순간 여기서부터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 매일매일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다 보면 문득 내 아이와 볼을 부비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고 속삭여줄 날도 반드시 찾아올 테다. 너는 내 인생의 숙제가 아니라 함께할 축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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