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 피스레터 다시 읽기 14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놓치고 있는 평화적 가치를 발견하여 글로 쓰고, 함께 읽고 소통하는 실천을 통해 평화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고, 우리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피스레터 다시 읽기>에서는 피스레터에 기고되었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홈페이지(www.okfriend.org)나 평화교육센터 블로그(https://peacecenter.ti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과거에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화폭에 담겼지만, 대부분의 전쟁화에서 화가는 전쟁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달랐다. 전쟁의 규모가 컸던 만큼, 화가들도 대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징집되었고,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이를 지켜보고 경험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이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감정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 클레는 세기말적인 불안감에 대한 감정을 나타낸 표현주의 화가로,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등과 함께 ‘청기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청기사파는 흩어지게 된다. 칸딘스키는 징병을 피해 고국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고, 동료였던 마르크와 마케는 군대에 징집되어 전장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클레는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비롯된 형태를 거부한 추상을 추구하게 된다.
<명분으로서의 죽음>은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 화가 마르크를 기린 작품으로 <시대의 메아리>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매체는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 그림을 사용했다. 이 그림을 클레의 동료 화가 마르크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닌,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자살을 알리는 지면에 사용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는 작금의 사회에 매우 격분하게 된다.
<명분으로서의 죽음>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클레는 소집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1916년 7월 예비군 보병연대에 소속되었지만,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게 된다. 바이에른의 왕이 뮌헨의 예술가들을 전장에 직접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항공학교의 회계과 서기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게 된다. 창조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전쟁은 모순된 관계이자 함께할 수 없는 위치라고 생각한 클레는 복무기간 동안 자신의 모순적 입장을 성찰하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끔찍한 경험을 지속하던 클레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문구를 쓰게 된다. “이 세상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 추상적이 되고, 세상이 행복할 때 예술은 지금-여기에서 생겨난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렸던 클레가 생각한 추상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대립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클레의 그림은 점점 ‘지금-여기’가 아닌 ‘추상’의 세계로 발전하였다.
이 작품은 클레가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그린 <지저귀는 기계>라는 작품이다. 클레는 이 그림을 통해 기계문명에 대한 불편함과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하게 된다. 전쟁에서 만났던 비행기, 탱크, 총 등 다양한 기계들은 그에게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릴 것만 같은 인공 새가 앙상하게 철사와 같은 선 위에 앉아 있다. 잉크가 얼룩진 것 같은 푸른 회색빛의 배경은 녹슨 느낌마저 난다. 그가 독일의 화가라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궁핍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그는 가까운 친구들을 많이 잃게 되었고, 전쟁의 비극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전쟁 이후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 미술이라 칭하며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100점 이상의 작품을 몰수했다. 1937년 미술에서의 모든 ‘퇴폐’를 청산한다는 목적으로 히틀러의 지시 하에 <퇴폐 미술전>이 뮌헨에서 열렸다. 이때 파울 클레의 작품도 7점 포함되게 된다. 전쟁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한 클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독일이 이르는 곳마다 시체 냄새가 난다” 클레는 이후 스위스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몰입하였고, 죽기 전까지 9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파울 클레가 정의한 예술은 다음과 같았다. “예술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있는 끔찍한 현실을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추상화로 그려낸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아동화의 모방이라 여겨졌던 평가에서, 황폐해진 유럽에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예술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힘든 시기의 유럽인들에게 그의 그림은 아픈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잊지 않게 해주는 치유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럽던 시대에 완성된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 역시 피폐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