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 피스레터 다시 읽기 15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놓치고 있는 평화적 가치를 발견하여 글로 쓰고, 함께 읽고 소통하는 실천을 통해 평화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고, 우리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피스레터 다시 읽기>에서는 피스레터에 기고되었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홈페이지(www.okfriend.org)나 평화교육센터 블로그(https://peacecenter.ti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모든 회화가 그러하듯 ‘풍자화’라는 장르가 처음부터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민중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진 최초의 풍자 화가는 프랑스의 사실주의 미술가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였다. 정치를 풍자한 장르가 처음이었던 만큼, 그는 최초의 반체제 화가로 불리고 있으며 평생을 민중의 편에서 활동하였다.
1800년 중반 유럽은 혼란의 시기였다. 1849년 수립된 로마 공화국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붕괴되었고, 프랑스군은 1866년까지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1852년부터 18년간 군림하며 식민지 획득 전쟁에 열을 올렸고,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중남미 등 각지에서 전쟁을 벌였다. 1864년 멕시코를 점령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세우려 했지만 이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전 상황이 계속되면서 1864년 프랑스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막시밀리안은 고립되어 자신의 장군들과 함께 총살당하게 된다.
멕시코 사건이 있은 후, 유럽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유럽은 오랜만에 피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진정한 평화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도미에는 이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평화를 겨우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노레 도미에, 『유럽의 균형』 (1866)
이 그림은 도미에가 1866년 작업한 석판화 <유럽의 균형>이다. 그림의 하단부에는 독일과 프랑스, 터키, 그리고 영국 군인이 총검을 모아 지구를 위태롭게 들고 있다. 당장 전쟁은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유럽인들은 지금의 평화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약속을 어기거나 다른 곳에 한눈을 판다면 이 균형은 유지될 수 없다. 누구 하나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평화로운 지구는 한순간의 실수로도 와르르 무너지고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미에는 단순하게 지금의 상황을 풍자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지만, 그 안에는 지금의 평화가 조금이라도 더 유지되기를 바랐던 그의 작은 소망이 담겨있었다.
오노레 도미에, 『유럽의 균형』 (1867)
도미에는 유럽의 위태로운 상황을 이야기하며 평화의 여신 이레네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했다. 그가 작업한 또 다른 동명의 작품 <유럽의 균형>에는 평화의 여신이 폭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양 팔을 벌려 균형을 잡고 있지만, 실상 이 평화는 여신이 조금이라도 중심을 잃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신의 곧 넘어질 듯 표정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어쩌면 이 폭탄은 1866년에 그린 위태롭게 총검 위에 놓인 지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렵게 균형을 잡고 있던 평화의 여신이 넘어지는 순간 지구는 폭탄이 되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피로 물들 것이다.
오노레 도미에, 『평화가 칼을 삼킬 때』 (1867)
평화의 여신은 급기야 자신의 입에 칼을 집어넣고야 만다. 칼을 입에 넣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답던 평화의 여신은 이제 늙고 지친 모습이다. 지긋지긋한 이 전쟁을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끝내고 싶은 것이다. 칼의 반 이상을 입에 집어넣은 평화의 여신의 뒤에는 수많은 민중들과 군인의 모습이 보인다.
유럽의 평화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난 일 년 후인 1968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으로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도 전쟁을 끝내고 싶던 군중들과 도미에의 소망은 처절하게 그림에 남겨졌다.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평화의 여신은 오늘도 칼을 삼키고 또 삼킨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