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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헤이 Jan 30. 2024

아빠의 김치

아빠의 생신을 기념해 김치로 아빠를 떠올려보는 하루.

아빠는 전라도 김치 아니 전라도 음식 마니아다. 지금은 경상도인 포항에 살고 계신데 우리 집안은 원래 전라도 집안이다. 어찌어찌된 이유로 할아버지가 젊은 날 포항으로 거처를 옮기신 이후로 우리 친가는 모두 포항에서 터를 잡게 되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혼자 남아계신 할머니를 포항에서 홀로 돌보고 계신다. 엄마와는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쯤 헤어지시고 이후 한번 더 재혼을 하셨지만 그 역시 끝은 좋지 않았다. 덕분에 난 2명의 배 다른 동생이 생겼고 사춘기를 맞는 시점과 맞물려 그 사람과(새엄마라고도... 왜 엄마라는 단어를 붙일까? 그러고 싶지 않다.) 살던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은 좋지 않지만 머리로는 '그 사람도 어렸을 때였으니...'라며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 어린 새댁이 다 큰, 그것도 불량한 청소년을 끼고 있는 게 얼마나 싫었을까? 

부모님의 이혼과 아빠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혼과 재혼 말고도 아빠에 대한 내 감정은 좋을 리가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아빠의 사업 실패로 나의 시련은 일찌감치 시작되었고 붙어놓은 대학도 포기해야 했고 단 한 푼도 쥐어진 것 없이 모두가 떠난 집에 황망히 혼자 남겨진 적도 있었다. 그때 아빠가 보여준 무책임은 아직도 가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유발하지만 역시 이 덕분에 빠르게 돈을 벌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덕분에 일머리가 트인 것도 있고 잠깐의 반수로 대학에도 입학해 스스로 학업도 마친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내 개고생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이 참담할 정도였다. 당연히 아빠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몇 년을 아빠와의 연락을 피했다. 그러다 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간 포항에서 아빠를 오랜만에 본 순간, 모든 미운 감정들이 다 쓸려내려 갔다. 까맣고 주름이 가득한 피부, 마른 몸, 더 작아진 것 같은 키. 우리 아빠는 넥타이를 수십 개 모을 정도로 '가오'로 살던 사람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 모습이 정말 보기 싫을 정도로 겉치레가 심했다. 이런 아빠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오페라나 뮤지컬을 보러 다녔고 스키 같은 고급 스포츠를 배웠다. 참 어찌 보면 이런 경험들을 일찍 해 본 것이 감사한 일로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1도 표 내지 않고 그저 마음속 깊이 반항심을 쌓아두고 있었다. 관심도 없는데 3~4일 내내 낯선 스키 캠프에서 눈으로 처박히고 있는 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 캠프에서도 불량 청소년처럼 수업을 포기하고 몰래 빠져나와 슬로프에 그냥 앉아있다 오기도 했다.(지금도 여전히 눈밭에서 하는 스포츠는 다 싫다.) 아빠와 둘이 나가 외식을 할 때면 경양식 집이나 피자헛, 그 당시 생소했던 TGI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고 지금의 코스트코인 프라이스클럽 같은 곳에서 장을 봤다. 아빠의 사업이 한참 잘될 때 넓지도 않은 집에 최신식의 홈시어터가 있었고 가구는 모두 수입산이었다. 친구들이 놀러 왔던 날 아빠는 체어맨 세단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난 창피했다. 어린 눈에도 그렇게 허황된 것들로 삶을 치장하는 아빠의 속내가 보였고 당시에는 아빠를 더 미워했던 것 같다. 그랬던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몇 년 동안 지방을 전전하며 힘들게 돈을 벌고 있던 상황에서 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서로의 모습을 보던 순간, 아빠 역시 나를 보고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한 번도 날씬했던 역사가 없던 나 역시 그 몇 년 간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터라 의도하지 않은 다이어트로 몸이 홀쭉해져 있었을 테니.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아빠를 두고 그날 밤 할머니와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밤, 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곡을 하며 온 밤을 지새우셨다. 나는 할머니의 곡 소리를 뒤로 하고 편의점 앞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나 역시 제일 좋아하던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것과 함께 달라진 아빠의 모습이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날을 기점으로 미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의 벽이 서서히 무너지며 나는 아빠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30살이 된 이후 진짜 제대로 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는 내 행복을 누리는데 집중했다. 정말 힘들고 팍팍했던 20대를 보상받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빠와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얼추 가까워진 부녀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아빠와 통화를 한다. 종종 천안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이랑 함께 아빠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이번 여름에는 짧지만 캠핑카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올라오며 고속도로 휴게소 맛집 순회도 했다. 배다른 동생이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잠깐 함께 자란 내 동생은 나에게 한없이 착하기만 하다. 비록 그 속은 무슨 마음일지 모르겠으나 나 역시 동생에게 항상 부족한 누나임을 알기에 가끔이라도 전화하면 받아주고(MZ가 전화받아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나?) 만나면 항상 따뜻한 동생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돌아보고 나니 아빠 - 나 - 동생의 사이가 꽤 많이 발전된 사이가 된 것 같아 새삼 놀랍고 감사하네.

아빠는 내가 뭘 먹었는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가 매일 궁금한가 보다. 통화를 할 때면 매번 뭐 먹었는지, 집에 먹을 게 있는지를 꼬박꼬박 물어오신다. 그러면서 혼자 있는 당신의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시고 본인의 과오들이 떠올라 나에게 내려오라는 이야기 한 번 강하게 못하는 모습이 느껴질 때도 있다. 당신 때문에 내가 결혼을 안 하는 것 같은, 아직도 좁은 집에 혼자 살고 있는 나에 대한 안타까움, 그 모든 것을 만든 자신에 대한 죄책감.(물론 나는 결혼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라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인 듯하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에 90% 만족한다. 오로지 주방 좁은 것 하나로 -10%.) 아빠의 이 마음을 알고 있으니 나 역시 단 한번 아빠에게 직설적으로 내 속마음을 말한 적 없다. 그냥 아니까. 일부러 과거를 끄집어내서 서로 아플 필요가 있나? 우린 이미 충분히 많이 아팠는데. 그래서 요즘은 더 조심히 말하게 되는 사이가 된 것 같다. 아빠도 나도.




못 챙겨준 어린 시절이 못내 미안하셨는지 아빠는 홈쇼핑에 먹을 것만 보면 나를 떠올리나 보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지만 게장, 김치만 보면 이 방송 저 방송을 보며 주문을 해 나에게 보낸다. 겨울이 되면 과메기와 쥐포가 올라오기도 한다. 다 먹지도 못하니까 보내지 마라고 사정사정을 해 이제는 게장과 과메기 등은 끊겼지만 김치만큼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올라온다. 동생과 함께 그토록 소원하던 전라남도 여행을 다녀오신 이후, (우리 아빠는 해남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소원이다.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이유다. 난 확실히 이 사람의 딸이 맞다.) 입맛에 맞는 반찬가게를 찾으셨는지 현재는 그 가게의 김치가 종류별로 온다. 아빠의 입맛에 그 가게 김치가 맞는 건 전형적인 전라도식 김치를 팔기 때문인 것 같다. 그건 어렸을 적부터 전주, 고창에서 자라 온 아빠에게는 고향의 맛이고 추억을 떠올리는 맛이기에 요즘 들어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아빠에게 돌아가고 싶은 기억만큼이나 다시 찾고 싶은 맛이 아닐까 싶다. 

아빠와 산 세월이 많지 않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가 보다. 나 역시 깔끔하고 시원한 서울 김치보다 강한 젓갈맛에 감치맛이 녹진하게 묻은 쿰쿰한 전라도 김치를 더 좋아한다. 가끔 싫어했던 아빠의 모습이 나에게 보일 때 흠칫 놀라곤 한다. '어쩔 수 없구나, 나도 아빠 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어른들의 옛날 말씀을 수긍하게 된다. 극도로 깔끔한, 결벽증이 있는 아빠의 모습, 옷, 기계 같은 걸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에 돈을 아끼고 싶지 않은 겉치레 가득한 모습, (나는 그걸 경험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가끔은 예민하고 가끔은 감성적이고 가끔은 소극적인 모습, 사업병이 걸린듯한 지금의 모습까지. 엄마는 아빠가 집에 돌아오거나 외갓집에 방문해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서 말없이 티비만 응시하던 모습이 그렇게 꼴 보기 싫었다고 했다. 지금 내가 딱 그 모습이다. 할머니네 집에 가서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재미있지도 않은 티비만 무표정한 모습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히 있고 아빠가 그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에 공감한다. 나름 싫은 걸 외면하고 쓸데없는 말을 해서 더 보태기 싫을 뿐이고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다른 할 일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외가와 친가는 정반대의 집안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아빠와 엄마가 절대 맞을 수 있는 성격의 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렸을 때는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아빠와 엄마의 이혼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결정적 이혼 원인을 제공한 것의 지분은 70% 이상 아빠에게 명백한 귀책사유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그 과오가 용납될 수는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 배경을 인지하게 되었을 뿐이고 나이가 들며 나 역시 아빠의 성격을 조금 더 닮아가고 있어 일정 부분 아빠의 행동에 대해 공감할 뿐이다. 

부정적인 아빠의 모습만 닮아 싫은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아빠의 좋은 부분도 꽤 많이 닮았다. 야근 후 새벽에 들어와도 핑계 대지 않고 어김없이 정시에 출근하는 성실함, 일에 대한 책임감, 공사를 구분하는 칼 같음, 그럼에도 신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 공감 능력, 지금은 술 마신 아빠의 모습에서만 찾을 수 있지만 말장난 같은 농담으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모습까지. 사람이 어떻게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이 인간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특성의 복합체이며 의도적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는 위인이고 친구이며 누구에게는 죄인이고 평생의 원수가 될 수 있다. 

 

몇 주 전, 역시 집 앞에 큰 택배가 하나 와있었다. 역시 아빠가 보낸 김치였다. 갓김치, 파김치, 배추김치, 총각김치, 고들빼기, 오징어 젓갈까지. 열어보니 쿰쿰한 전라도 김치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좁은 냉장고 안이 김치로 가득 찬다. 더 이상 남는 김치통도 없어 또 몇 개를 주문한다. 비록 많은 김치를 나눠 담고 냉장고 안에 쑤셔박을때만큼은 스트레스가 보통 쌓이는 게 아니지만 한동안은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김치도 종류별로 담아먹는 부자. 밥 하나만 있어도 부자처럼 밥 한 끼 먹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빠의 바람이란, 냉장고만큼은 두둑이 채워져 있길 바라는 것 같고 하나만 놓고 먹어도 배를 든든히 채우고도 남는 밥도둑 반찬만 있으면 적어도 얘가 굶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나이 먹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아빠의 응원과 사랑을 보내온다. 알다시피 이렇게 잘해먹고 살 수도 없는데... 아빠의 이 큰 착각을 어떻게 바꿔드리나 싶지만 나 역시 맹목적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그냥 받고만 싶은, 어린애가 될 때가 있으므로 당분간 김치는 아빠에게 꼬박꼬박 받을 예정이다.


통이 없다. 통이 없어.
최애 밥도둑들. 다른 김치들은 '반찬'의 느낌이지만 고들빼기와 총각김치는 정말 이것만 두고 온전히 이 맛만 느끼고 싶을만큼 '밥도둑'들이다.
밥 한 끼에 김치를 종류별로 담아 먹는 사람, 많지 않다. 나도 옛날 사람인 것 같다. 이거 하나로 부자 같다는 마음을 느끼다니.
새 김치에는 수육과 굴이다. 이렇게 겨울을 시작한다.


아빠의 생신 날.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는 생일이 별거냐며 어묵탕에 소맥 한잔하고 있다고 하신다. 오랜만에 아빠의 소소한 하루를 들어본다. 요즘은 성경도 읽고 교회도 나가고 있다고. 새롭게 아빠 주변에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생겼나 보다. 그렇게 소원했던 내 하나의 기도제목이 이루어진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다. 아빠의 생신날 의도치 않게 내가 선물을 받았지만 이내 곧 마음은 불편해진다. 내 상황이, 내 마음이 지금 괜찮았더라면 포항으로 갔을 텐데... 아빠의 심장에 박혀있는 4개의 스탠스와 그때 빌린 수술비를 사촌언니에게 다 갚았다는 이야기는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빠는 오랜만에 구룡포를 갔다며 구룡포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찍은 드넓은 포항의 바다 사진을 보내주신다. 덧붙이는 이야기는 강압적인 건 아니지만 구정 때 내려오면 좋겠다는. 아빠의 이런 직접적인 바람은 오랜만이었다. 외할머니네서 음식을 해야 하는 핑계로 일단 아쉬운 마음을 전했지만 더 우선되는 이유는 방향성을 잃어버린 지금 내 마음의 문제가 더 크다. 이왕이면 즐겁게, 아주 긍정적인 모습의 나를 보여주고 싶은데, 지금의 나는 누구를 만나고 싶은 에너지도 웃음도 상실한 상태인 것 같다. 그래도 아빠의 이야기는 계속 마음에 남아 아무래도 다음 달에는 포항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뭐든 후회로는 남기고 싶지 않다. 찰나처럼 지나갈 불편한 마음 하나가 뭐 별거라고. 냉랭해진 겨울, 내 마음은 춥지만 나도 아빠의 김치만큼의 따뜻함은 아빠에게 전하고 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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