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들으면 마치 이별지침서 정도로 보이고,
장르도 스릴러나 멜로드라마로 구분되어 있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작가나 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제 각각일 수 있으며,
그런 말에 힘입어 기존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글을 쓴다.
언어
"기도수 씨 아내 송서래입니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부족합니다"
이 말은 이 영화를 관객이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지침이며 배우들의 연기를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한국말, 즉 언어가 서투니 그 안에 들은 의미, 즉 실질을 잘 살펴 달라는 것이다.
"마침내", "단일한", "난 깨끗해요",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이러한 말들은 그 드러난 표현이 아닌 그 안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
또한 해준(박해일)은 서래(탕웨이)의 말을 들을 때, 말 보다 서래가 그 어색한 표현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더듬는다. 더구나 중국어로 말할 때의 서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역기가 아니라 그 속마음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마음을 얻고 싶다는 사랑의 언어를 심장을 도려내고 싶다는 죽임의 언어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그렇게 언어와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런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즉, 해준은 기도수가 추락한 그 낙하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하여 걸어가는 편한 코스 대신 굳이 힘들게 승강기를 타고 절벽을 기어오른다. 서래는 자신의 남편 기도수가 죽었을 때의 상태를 해준의 언어를 통해서 듣기보다 직접 사진으로 보기를 원한다.
후에 해준이 사찰 씬에서 서래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은 서로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래서 그들은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한편, 해준의 아내 정안은 어떠한가?
정안 역시 최연소 원자로 조정감독자라는 타이틀을 얻은 수재로서, 이 분별세계의 핵인싸이다. 정안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해준이 차려놓은 된장찌개가 있는 식탁으로 걸어하면서 말한다."걔 이과라 나 닮았어. 난 완벽하게 이해되는데?"라고.
"걔 이과라 나 닮았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꼭 짚어 이야기하기는 그렇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움이나 찝찝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그럼 그대도 전도망상된 언어의 굴레에 흠뻑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부모인 나 닮아서 이과성향이야" 가 보다 자연스럽고 세상 이치에 더 부합하는 말 아닌가?
이는 정안이 세상이 규정한 "이과", "문과"라는 구분에 따라 부모와 자식의 닮음의 정도도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며, 늘 세상의 통계와 신문기사와 남 이야기를 근거로 드는 정안의 정신세계의 근저를 엿볼 수 있는 대사이다.
마치, 세상의 엔트로피의 변화량을 관찰하니 외부 영향이 없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열역학 제2법칙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유명한 법칙이 있으니 세상은 그에 따라 돌아가야 마땅하고 따라서 세상의 실제 움직임이야 어떻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엔트로피는 증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너는 입자냐? 파동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네 정체를 밝혀라."
"또는 너는 전기장이냐? 자기장이냐? 일도양단 네 정체는 무엇이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하며, 정안의 대사로부터 우리는 이해하여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언어도단 즉 언어의 길이 끊어진 관점이 어떤 면에서는 꼭 필요하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죽여주는 여자
서래의 행동을 사회적 규범이나 실정법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서래는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범이다.
서래는 어머니를 좀 더 전문적으로 간호하기 위하여 간호사가 되었으나, 결국은 그 전문성을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는 데 사용한다. 사회적 규범으로는 친족살인이지만, 서래의 어머니에게는 더없이 편안한 죽음이었으리라. 서래는 자신이 그 일로 인해 중국에서 무기징역에 처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 악역을 담담히 자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때의 죽임을 사회적 개념으로 재단하여 범죄적 살인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굳이 현대적 개념을 빌리면 의료인이 자기가 처벌받을 것을 감수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 고통일 뿐이고 다시 일어날 가망성이 없는 자들에게 자기에게 별 이익도 없는 안락한 마무리를 선사해 준 것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서래는 이러한 사회적 터부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판단으로 빚쟁이 서철성의 어머니 역시 편안한 죽음으로 인도한다. 서철성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 안마를 해주고, 죽기 직전 서철성의 어머니가 "고맙다"라고 할 만큼 편안한 상태에서 세상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전의 장면 즉, 서래가 서철성에게 맞으면서도 서철성의 노모가 당뇨 합병증으로 1달밖에 못 산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에서, 비록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자의 노모이지만 그의 안온한 죽음을 위하여 자신이 할 역할이 있을 것임을 서래는 직감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노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효자 서철성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모가 당뇨 합병증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없이 고통을 겪으며 죽음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그 고통을 덜어주려 하기보다 사회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조금이라고 더 노모의 고통스러운 삶이 연장되기를 바란다. 또한, 노모의 죽음을 화해와 용서가 아닌 복수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즉, 노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전에 임호신을 죽일 것이라고 공언함으로써 노모의 죽음을 또 다른 죽음으로 연결시킨다. 나아가, 어머니를 산소에 매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과연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과 자세에 있어 서철성이 서래보다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가?
과연 고인이 서철성의 애도를 더 반겨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지상과제가 저출산 극복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생태계 보호를 위하여 우리나라만이라도 저출산을 더욱 가속화시켜야 한다고 하는 주장도 한 번 들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성숙하고 열린 사회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삶의 질이야 어떻든 간에 죽지 않고 1분 1초라도 더 사는 것이 절대적 선이고 미덕이라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고정관념도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서래는 이생에서 가망 없는 힘든 투병생활을 하며 빨리 죽기만을 바라는 이들을 고통 없이 죽여주는 악역을 기꺼이 감당하는 여자이다.
죽이는 여자
기도수는 서래의 말을 들어주고 똥오줌 밴 냄새를 맡아주고, 한국국적을 따도록 도와준 "단일한" 은인인 동시에,
서래를 상처가 드러나지 않도록 지능적으로 폭행하는 나쁜 남편이며,
평소 출입국관리소에서 무수한 사람을 대해야 하지만, 정작 마음 터놓을 친구는 하나 없는 은퇴한 공무원이다.
또한, 비록 구독자수가 5명에 불과하지만 기도수TV를 운영하며 사회에서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는 중년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암벽등반을 할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본디 사람은 이러하다. 착하기만 하거나 못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서래는 그에게 맞아 뼈가 부러졌으나, 병원에 가서는 자꾸 웃음을 짓는다.
서래에게 자신에 대한 그의 폭행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다 어머니 발을 밟은 격이다.
즉, 서래가 기도수를 죽인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놔두면 뇌물이나 탐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등의 사회적 부작용을 일으켜 여러 사람을 괴롭힐 것이고, 그 자신도 비리나 저지르다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기도수에게, 삶의 절정의 순간에 가장 행복하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서래가 굳이 138층 높이의 비금봉까지 올라 말러의 5번 교향곡 5번 악장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를 죽이는 것은 너무도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단순히 기도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으면 훨씬 더 간편한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암벽을 기어오르며 힘들어서 우는 서래와 비금봉 정상에 올라 위스키를 한 잔 마시며 시원한 바람 속에서 말러의 5번 교향곡 5악장 시작부를 듣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황홀경에 취한 기도수의 대비를 보라.
서래는 멀리 싫어하는 산까지 따라와, "더러운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 할 만큼 기도수에게는 최고의 순간에 기도수를 더러운 세상과 분리시킨다.
심지어 기도수는 외부 소음이 거의 들어오지 않을 좋은 이어폰까지 끼고 있어, 서래가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달려드는 비정한 소음을 거의 느낄 수도 없다. 더구나 그 순간은 기도수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가장 좋아하는 말러의 5번 교향곡 5악장이 시작되는 순간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기도수 손목의 롤렉스 시계 초침이 10시 1분 59초에서 2분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영화 화면도 같이 멈춘다. 이는 그야말로 '시간이 멈춘' 찰나의 순간이다. 기도수는 그야말로 찰나의 배신감, 두려움 대신 영원한 안식과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를 얻었다.
얼마나 자비로운가?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남편을 죽이는 서래의 범행에 비정함을 느꼈으나, 다시 보면 볼수록 서래의 그 자비로움에 울컥할 지경이었다.
서래는 기도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음을 원하지 않았으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도수에게 기도수에게 구원을 선물한 것이다.
여기서 이 글을 읽는 중간에 한 템포의 쉼이 필요하거나 눈이 뻑뻑해져 인공눈물이라도 넣어야 한다면,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과 5악장을 듣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UkQBbb4Wiuc?si=_1mvgKvJV_Bo-U4z&t=2824
KBS교향악단 [4K] 말러 교향곡 제5번 G. Mahler / Symphony No.5 in c# minor 피에타리 잉키넨 지휘 Pietari Inkinen (2023.1.28)
말러의 5번 교향곡의 별칭은 "새로운 출발"이다. 5번 교향곡을 지을 즈음 말러는 장출혈이라는 지옥과 20세 연하의 알마 쉰들러와 결혼이라는 천국을 오갔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퇴직 공무원인 기도수와 서래의 나이 차이도 그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서래와의 만남과 헤어짐 어떤 것이 기도수에게는 천국이고 지옥이었을까?
죽어주는 여자
서래는 해준이 싫어하는 것이 살인현장의 피와 거기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라는 것을 기억했다가 두 번째 남편인 임호신이 죽었을 때, 유혈이 낭자한 수영장과 그 냄새를 해준이 접하지 못하도록 물을 빼고 깨끗이 청소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전에 서래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을 위해, 성인남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큰 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서 어머니가 만사 제쳐놓고 쫓아오듯 해준의 집으로 찾아와 해준을 잠재워 주는 번거로움과 다른 사람들의 오해어린 시선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리고 해준은 서래 덕분에 잠이 들면서, 다음 장면은 그야말로 둘에게는 꿈같은 사찰 씬이다.
둘 밖에 없는 고즈넉한 비 오는 사찰에서 둘은 형사와 피의자가 아닌 사랑하는 남녀로 처음 만난다. 해준이 녹음한 그동안의 음성파일을 들으며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형사와 피의자로 만난 조사실에서 둘은 테이블을 닦던 물티슈를 건네는 것도 머뭇거리는 사이였으나, 사랑하는 연인으로 만난 사찰에서는 립글로스를 매개로 수줍게 입맞춤을 한다. 이후 호미산 장면에서는 어떠한 매개도 없이 둘은 입맞춤을 한다. 서로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인연의 전개이다.
또한, 조사실에서 서래는 한 걸음 떨어져 해준이 벌린 봉투에 테이블을 닦고 난 물티슈를 던져 버리지만, 처음 만난 사찰에서는 주머니 많은 해준의 외투 구석구석에 손 넣어보고 해준은 이를 기꺼이 허용하며 설명해 준다. 물론 이 때도 해준은 자신이 휴일에도 출동하기 위한 모범적인 형사라는 자부심과 품위를 강조한다.
서래가 장난스레 자신의 외투에 있는 많은 주머니 하나하나에 손을 넣어 그 안에 들은 물건을 만져보도록 허용하는 것은 해준이 자신의 속마음을 기꺼이 서래에게 내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해준의 서래를 향한 마음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해준도 이미 서래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운명적인 전개가 있을 것임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내 정안과의 잠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사건을 중국인 아내가 죽은 사건으로 사실과 다르게 둘러댄다.
또 아내 정안에게 "초밥은 아무 초밥이나 먹기 싫어"라고 하지만, 결국 그 아무 초밥이 아닌 3~4만 원은 되어 보이는 시마스시 모둠초밥을 같이 시켜 먹은 상대는 피의자 서래이다.
초밥을 다 먹고 나서는 어떤가? 집에서 해준은 홀로 된장찌개를 해서 밥 투정하는 정안에게 밥상을 차려주지만, 서래와는 초밥을 먹은 후 오래된 부부처럼 손발을 척척 맞춰 정리를 한다. 도시락통을 포개고 테이블을 닦고 테이블을 닦던 물티슈를 머뭇거리다 건네고, 마지막으로 소꿉장난 하듯이 해준이 벌린 봉투 안에 서래가 물티슈를 골인시키는 설레고 완벽한 장면을 보라.
또한, 서래가 허리를 꼿꼿이 하고 마치 '나의 스승님은 지혜로운 부처님이고,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나 무조건 인자하게 구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라고 하는 듯, 일본군의 목을 물어뜯은 계봉석의 손녀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후, 서로 연인처럼 훈장수여식 때의 젊을 적 서래 사진을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같이 보는 장면을 보라.
"해준과 서래의 서로에 대한 마음씀을 세속 시간의 길고 짧음으로는 결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해준은 혼란스럽다.
해준은 그 행복한 사찰에서의 밀회 장면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난 깨끗해요"라고 어찌 보면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해준이 속한 세계의 규칙인 일부일처제에서 다른 이성을 연인의 감정을 가지고 만나는 것은 옳지도 깨끗하지도 못한 일이다. 그럼에도 해준은 서래와 서로 이끌렸고 그것이 마음에 걸려 "난 깨끗하다"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해준의 서래에 대한 감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자, 해준은 서래가 피의자의 지위를 벗어난 순간 이미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최연소로 경감에 승진한 현실사회의 똑똑이 해준은 서래에 대한 마음을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조직을 위해서 끊임없이 서래와 그 무게를 저울질한다.
서래의 인도로 올라간 호미산에서 유골을 뿌리기 전 해준은 "지난 402일 동안 당신을... 당신이..."라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려다 다시 깨끗하고 품위 있고 자부심 있는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듯, "그렇다고 해서 난 경찰이고 당신이 피의자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또한, 해준은 서래의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유골을 고소공포증이 있는 서래를 대신하여 낭떠러지에서 뿌리던 중, 뒤에서 접근한 서래의 포옹에 깜짝 놀란다. 이는 해준이 자신도 비금봉에서 서래에게 떠밀려 죽은 기도수와 같은 운명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서래에 대한 일말의 불신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우리'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기도수 사건이 자진(自盡)으로 처리되며 사건종료되었음을 통보하는 해준이 서래에게 먼저 쓴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서래가 "'우리'의 추억을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아요" 하니, 정작 해준은 자기가 처음 꺼냈던 '우리'라는 말에 정색을 하는 등 서래와 자신, 가족, 조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다.
겉으로는 치매노인에 불과하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해동할머니가 "시리야"를 "시래야"로 잘못 발음하면서 사건의 진실은 드러나고, 이를 계기로 서래는 자신이 해준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킬 증거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서래가 자진을 결심한 것은 아마도 해준이 '붕괴되었다'라고 한 그 장면에서 결심이 섰을 것이다. 또한, 그 방법 역시 해준이 "(범죄의 증거가 되는) 스마트폰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저 멀리 바다에 버려요"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해준이 된다는 뜻인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자부심 있고 품위가 있는 형사로서는 살아가기 힘들게 된다는 것을 함께 의미한다.
이는 서래 자신이 폭행을 당하거나 사회적 비난이나 형벌을 받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서래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즉, 붕괴된 해준이 다시 현실 속에서 유능한 경찰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바다에서 아무도 못 찾을 방식으로 죽어주기로 하고 대신 다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스마트폰을 건넨다.
서래는 마치 중생을 위해 자신의 옷가지를 모두 벗어주고 창피한 나머지 땅속에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지장보살과 같이, 자신이 사랑하는 해준을 위해서 살아있으면 해준의 붕괴를 가속화시킬 자신의 몸을 아무도 못 찾도록, 바닷가 해변에 모래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최후를 맞는다.
영화개봉 당시에 점심을 같이 먹으며 동료에게 이런 말을 물어본 적이 있다.
"사람이 그렇게 해서 죽을 수 있습니까? '생존본능'이 있어서, 처음에는 죽으려고 호기롭게 들어갔어도 정작 물이 차고 숨이 턱밑에 차면 살려고 기어 나올 것 같은데.... 더구나 모래를 쌓아둔 방향을 보세요. 모래를 바다 쪽에 쌓아두어야 파도에 모래가 확 들이쳐서 눈도 못 뜨고 방향감각이 없어져서 기어 나오지 못하지, 서래는 반대편에 모래를 쌓아 두었잖아요.
살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원래 자진이 그렇잖아요. 불가역적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 상황은 충분히 되돌릴 수 있잖아요. 서래가 남은 펜타닐을 먹은 것일까요? 하여간 서래가 죽은 게 맞는 거긴 할까요?"
그런데 만약, 만약 그런 방식으로 서래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생존본능을 거슬러 그게 가능할 만큼 서래에게는 해준에 대한 생각이 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서래의 마지막 바람은 해준의 영원한 미결사건이 되어, 해준의 방 커튼 뒤 사진으로 영원히 해준과 함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구원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그런데 해준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의 아내 정안은 기껏 한 달 단위로 세어 16년 8개월 동안 해준과의 만남과 잠자리가 좋았음을 기억하지만, 해준은 일 단위까지 정확히 계산하여 402일 동안 서래를 그리워했음을 절절하게 고백하고 있다. 해준이 정안과 같은 과학 지식에 밝은 이과출신이었으면 아마도 일 단위가 아니라 플랑크시간 단위로 서래의 부재에 따른 공허감과 괴로움을 표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함께한 물리적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서래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은 정안을 향한 것보다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해준은 늦게 찾아온 사랑 서래를 잊지 못하고, 자신이 그의 죽음에 큰 영향이 있다는 죄책감으로 자책하며 평생을 비참하게 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과연 서래가 죽어서까지 해준을 사랑한 서래의 뜻이었을까?
과연 서래의 원래 뜻대로 어떻게 해야 해준은 구원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해준이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해준이 자신의 향한 서래의 뜻에 눈 뜨고, 원래 서래와 소통하던 방식 즉, 사회의 언어와 생각과 고정관념을 넘어 붕괴 역시 구원이라는 것에 눈을 뜸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사회의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도 구원할 수 있고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트라우마를 가진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구원은 결국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는 수밖에 없고, 그게 구원자의 뜻에도 부합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 좋지 않을까 한다.
잡설
1) 서래는 서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달마를 비롯한 불교인물들이 인도에서 중국과 한국으로 온 것을 의미한다. 실제 처음 서래는 그 뜻의 한자로 써졌으나, 중국어 발음이 안 예뻐서 다른 한자로 교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탕웨이의 얼굴 한편에서 인도 여자의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2) 해인사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 해"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며, 공자님 말씀에도 "지혜로운 자는 바다를 좋아한다"가 있는 만큼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해준과 해동의 "해"는 그러한 지혜나 진리에서 모티브를 받은 작명이 아닐까 한다.
3) 주로 남들의 말이나 통계, 즉 사회적 관념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매우 합리적인 듯 보이는 해준의 부인 안정안에 대하여 궁금하다면 초반 액자 장면을 보아라. 신문을 스크랩한 액자에 안정안에 대한 자세한 모든 것(전국에 몇 개 없는 원자핵공학과를 나왔으며...)이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해상도로 클로즈업되어 있다.
4) 사실 나에게는 위에서 말한 것 외에도 온갖 종교적, 불교적 상징과 이야기로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작가 정서경의 인터뷰를 보고 불교 이야기가 전혀 안 나오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물론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안 한 것이거나 몇 가지 추측되는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세상사를 내가 하나의 관점으로 보려고만 하는 나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연기 대상
금상(공동수상)
인력사무소의 완전 쾌활 발랄하신 실장님.
자기 자식 같은 자라의 가격을 외치는 자라양식장 사장님.
연기대상
어시장 아주머니
수상이유 : 어시장에서 두 남자의 자기 혼자들만 웃는 시답잖은 농담이 오가는 장면 직후, 왼쪽 뒤편에 마치 월터미티의 유령표범과 같이 잠시 나왔다 사라지는 생선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이 아주머니의 연기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마치 일본 국보로 지정된 조선의 막사발과 같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모두 여성이 수상했다.
박해일이나 탕웨이 등은 연기를 너무 잘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나름대로 결론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 또는 스릴러 영화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원은 어떻게 완성되는지에 대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