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맹은 윤철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였는가?
영화를 보신 분이 그다지 많을 것 같지 않아서 나무위키 링크를 덧붙입니다.
또한, 이 감상평은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영화의 해석에 있어 선입견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인물 설명
윤철-지나의 아버지, 조각가를 꿈꾸었으나 지금은 인테리어업자 거의 막노동꾼, 이혼한 상태, 노래를 못 부름.
지나-윤철이 이혼한 아내와 낳은 딸, 출가 후 법명은 도맹
영지-역사?인문? 강사, 윤철의 현재 연인, 유방암을 앓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지식을 쌓아가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부모는 자식의 탄생부터 함께한 자신이 세상에서 자식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자식은 자신의 경험과 삶의 교훈을 전달하여야 할 훈육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식의 전체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즉, 부모는 자식을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배우고 성장할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믿는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으면서도 정작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며,
세상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부모는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자신이 실패한 부모는 아닐지, 오답의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아닐지 걱정한다.
이 영화는 아버지 윤철과 딸 지나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봄으로써 보면서 일어나는 부녀간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아가, 딸인 도맹 행자의 안내로 아버지 윤철이 이러한 사람들의 착각과 오해를 깨고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해 본다.
아버지 윤철을 닮아 미술에 재능은 있으나, 학교에서는 아무 곳에나 기괴한 그림을 그리는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한편, 아버지에게는 사춘기 반항기가 심한, 지도가 필요한 딸로 인식되는 지나.
지나는 카페에서 윤철에게 출가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 본다.
지나는 자신의 그림을 윤철에게 보여주며,
"얘가 자꾸 방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런데 아무도 못 들어. 그래서 얘가 스스로 목을 찔러"
라고 자신의 심정을 알아달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남들의 시선이 중요한 윤철은 그 그림이 지나가 자신의 상황을 좀 알아달라고, 출가를 결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인지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한 채
"이런 거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마. 남들이 이해를 못 하잖아?",
"네가 문제지, 내가 문제냐?"
라고 나무란다.
이에 지나는 마음속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윤철에게
"평생 그렇게 살아"
라는 독설을 남기고 떠난다. 하지만 지나도 자신이 이혼한 엄마보다는 아버지 윤철을 훨씬 많이 닮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라는 말은 "내가 출가해서 아빠를 의무감과 열등감을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로 이끌겠다"는 결심을 반대로 표현한 것이다.
지나가 출가 전 문신을 지우러 간 병원에서도 윤철은 여전히 지나의 결심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에게는 흉측하게 보이는 문신에만 집중한다. 윤철은 이것이 속세에서의 부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다시 영화 초반부로 돌아가 윤철의 작업장 씬을 보자.
자신의 작업장 근처에 사는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줘도 환영받지 못하는 윤철.
윤철은 그 작업장에서 화성 주위를 도는 2개의 위성을 표현한 조각품이자 인테리어 장식품인 '왕겁쟁이'와 '허둥이'를 거의 다 완성해 가고 있다.
윤철은 '왕겁쟁이' 위에 자신을 닮은 사람을, 자신의 삶이 의도대로 흘러왔다면 그랬을 법한 모습인 우뚝 솟은 형태로 만들었다가, 순간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이내 긁어낸다. 그리고 모난 곳이 없는 둥근 구형이 되도록 편평하게 다듬고 방망이질한다. 윤철은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은 왕겁쟁이가 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지불식간에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구형에 가까운 '왕겁쟁이'와 달리 '허둥이'는 아주 울퉁불퉁하고 비정형의 위성이다. 그 크기는 '왕겁쟁이'보다 작게 만들어져 있다. 마치 지나와 같이 순수한 흰색의 위성이지만, 다듬어지지 않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모습이다.
생일을 맞은 조각가 후배인 재훈이 자신의 아이가 용돈을 모아 선물했다는 케이크를 들고 작업장으로 찾아오고, 윤철은 부러운 듯 '잘 키웠네' 라며 재훈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윤철) 소연이 올해 초등학교 들어가지 않나?
(재훈) 아이. 아니야. 내년이야.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아휴 돈 벌어야지... 그게 내 일이지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지 않는가?
아이 유치원 가기 전에 돈을 좀 모아서 영어유치원을 보내야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집은 못 사도 빌라 전세 정도는 마련해야지.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대치동을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목동이나 교육특구라도 가야지.
고등학교 가서도 전세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아이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을 텐데, 그전에 작은 집이라도 자가로 마련해야지.
고등학교 들어가면 좋은 인강강사에게 직접 수강할 있게 줄이라도 서 줄 수 있데 대형학원 설명회는 다녀봐야지.
대학 들어가면 요즘은 다들 간다는 외국에는 한 번 내보야지.
내가 그래도 아이 결혼할 때 전세보증금 반 정도는 해 줄 수 있어야 그럴듯한 배우자를 맞이할 수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아이가 혹시 기죽는 건 아닌지.. 뼈 빠지게 마지막 불을 태워야지.
결혼할 때 적어도 회사에서 이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전에 우선 잘리기라도 하면 그동안 뿌려놓은 축의금 회수도 못하고 화환도 몇 개 안 올 텐데 어떤 난관과 비굴함이 있어도 버텨야 한다. 잘려도 결혼식 다음날 잘리기로 하는 것으로.....
등등등
자식을 키워 본 부모는 정도와 범위의 차이가 있겠지만 다들 일정 부분은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이 생각해서 그 정도 준비해야 한다는 준비가 끝나기 전에 그 시기가 오면 그야말로 큰일 날 일이 되는 것이다.
재훈도 그래서, 즉 부모로서 해야 할 정해진 정답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자기 자식의 초등학교 입학이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데드라인이나 마지노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이어진다.
(윤철) 거의 다 된 건데, 벌써 이름도 지어줬어, 얘 이름이 '허둥이', 그리고 쟤가 뭐야 '왕겁쟁이'
(재훈) (왕겁쟁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다는 듯) 왕겁쟁이? 아이 좀 그런데 좀 크지 않아? 어? 왕겁쟁이. 왕겁쟁이가 허둥이 보다 좀 작다면서...
(윤철) 근데 또 하다 보니까 디테일을 보여 주는 게 좀 더 중요한 거 같더라고.
(윤철) 뭐. 그래도 애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 것 같은데... 위성은 평생 화성의 한쪽 면밖에 못 본단다. 뭐 이런 얘기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저 못 생긴 울퉁불퉁한 위성에 애정을 가지지 않겠어?
실제 화성 주위를 도는 2개의 위성 이름은 포보스와 데이모스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포보스는 공포를 의인화한 신이고 데이모스는 두려움을 의인화한 신인데 실제 크기는 포보스가 더 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쌍둥이 형제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자주 다툰다고 한다.
윤철과 지나도 그렇다. 아버지와 자식이지만 서로 너무나 닮은 쌍둥이 같은 존재이며, 포보스와 데이모스가 평생 화성의 한 쪽면만 보는 것처럼 윤철과 지나도 서로를 전체로서가 아니라 한 면 만을 보기에 서로 다투는 것이다.
어쩌면, 재훈의 지적처럼 윤철이 지나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데이모스로 비유된 지나는 포보스로 비유된 윤철을 이미 뛰어넘는 마음의 크기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서로 무관한 듯 떨어져 있는 것은 영겁의 시공간에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그들은 우주에서 방황하며 떠돌다 저 우주 멀리 어디엔가 홀로 있는 섬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뒤늦게 문자로 지나의 출가를 통보받은 윤철은 속마음을 연인 영지에게 털어놓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
세상사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고, 아버지는 자식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자식을 가장 좋은 길로 안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윤철은 이를 모른다. 대부분의 세상 부모들도 윤철처럼 이를 모른다.
그러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불쌍하다. 부모의 말이 진리인 듯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부모 역시 안타깝다. 부모는 자식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앞에서 자식을 잘 이끌어야 하며, 다른 부모보다 적어도 못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지나를 믿어?"
라는 영지의 물음에는 윤철은 바로 믿는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믿는다'는 뜻도 모른 채 대답을 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게 뭐야? 그 아이가 뭘 하든 믿어준다는 거야? 아니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준다는 거야?"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행복하다', '우수하다', '앞서간다', '월등하다', 심지어 "깨닫는다"는 말의 의미도 모른 채 그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평생 동안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윤철은 이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진정으로 지나를 믿게 된다.
한편, 자신에게 되뇐다.
"만약 미술가가 되지 못한다면, 스님이나 신부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나가 그때 내 나이가 되었다. 미대입시를 준비하다가 관두고 갑자기 절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아마 윤철도 미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힘든 일이 많았으므로 스님이나 신부님이 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자신과 똑 닮은 딸이 그러한 생각을 하리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부모는 자식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식의 한 면만 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식을 잘 안다는 생각이 자식의 본모습을 못 보도록 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더구나 그 부모가 아동심리학자나 교육학자나 교사나 교수인 경우, 해결책은 더욱 미궁에 빠지고 부모와 아이는 더욱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모가 아동의 심리를 잘 알고, 교육방법도 일반부모보다 많이 공부했으며, 자신이 가르친 아주 많은 제자들의 교육과정을 통한 경험이 풍부하니, 자신의 자식이나 손녀손자를 그 틀 안에서 해석하고 지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나 할아버지는 물론 자식이나 손녀손자를 숨 막히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나가 받은 법명은 '도맹'. 아마 길이 안 보인다는 뜻의 도맹(道盲)이 아닐까 추측한다. 지나가 행자가 된 시점에서 지나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길이 안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나가 절에 들어가 행자가 된 때부터 윤철은 도맹의 주위를 온갖 핑계를 만들어 서성이며, 도맹이 절에서 내쫓겼으면 하는, 즉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 자신의 딸이 되고 대학도 진학하였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즉, 주지스님에게 도맹이 하루종일 주차장에서 인터넷만 하고 있다고 고자질을 하기도 하고, 도맹이 스님으로서의 비전이 있냐는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아마 윤철은 도맹이 유명한 미술가는 못 되어도, 불교책도 내고 유튜브에서 설법도 하는 유명한 스님이라도 되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주지스님이 이러한 윤철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터, 절에 가끔 오라는 말을 듣자 자신이 나가면 할 일이 아주 많아져서 절 생활이 고달파질 것이라며 도맹에게도 같이 나갈 생각이 있는 지 마음을 떠 본다.
윤철은 절을 떠나면서 자꾸 도맹에게 "행자님 뭐 필요한 거 없어요?"라고 자꾸 묻는다. 나오는 눈물을 참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도맹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머뭇거린다. 아마 "천방이 간식 좀 사 와"라는 주지스님의 끼어듦이 없었다면 아마 도맹은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으리라.
도맹이 하려던 말은 무었을까?. 눈물을 참던 도맹이 "행자님 뭐 필요한 거 없어요?"라는 윤철의 반복된 질문에 진짜 답하고 싶었던 것은 "아빠요. 제가 필요한 건 아빠예요. 아빠가 계속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가 아니었을 까...
도맹도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지만, 윤철이 떠나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흩뿌리며 달리기를 한다. 도맹 역시 아버지 윤철에 대한 그리움을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도맹은 아마 그런 과정에서 뒤에서 이야기하는 "나도 한번 죽어봤어" 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 경험이 실제 자진을 의미하는 것이건, 아니면 정신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건 간에...
이때 가장 중요한 변화의 포인트는 그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윤철에게 지나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교육해야 할 대상인 자식에 불과하지 그의 의견이나 생각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또한, 지나에게도 윤철은 답답하고 무능력하고 일을 엄마에게만 미루는 아빠였을 뿐 자기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자신의 목숨까지 건 고마운 존재라는 점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었다.
그러나 반 강제로 또는 절이라는 분위기 때문에, 도맹은 윤철을 거사님이라 부르고 윤철은 도맹을 행자님으로 부르며, 그들은 서로에게 존댓말을 쓴다. 그렇게 그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상대의 전체 모습을 조금씩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윤철의 혼란스러운 생각이 한 번에 제거된 것은 아니다.
스님은 생일잔치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양자 중에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지스님의 권유로 소주를 안 팔지만 손님들이 사 와서 먹는 것은 허용하며, 자기 자신은 잠자기 전 소주를 먹는다. 또한, 도맹의 생일날 도맹의 폐활량을 키워야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기 생일 때 자신은 케이크의 촛불 하나 끄지 못한다. 도맹이 영지에게 자신이 윈난성에서 겪은 사람들과의 진실한 교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그럴 땐 복대를 찼었어야죠", "엄마에게 전화는 했어요?"라고 부모로서의 훈계를 그만두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 영지가 좋아하는 과일은 그 품종까지 알고 있지만, 20년 가까이 산 딸인 도맹이 좋아하는 것은 알지 못하여 포도를 들었다가 도맹의 눈치를 보고 바로 딸기로 바꿔달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잡하게 그려진 손님 초상화와 대비되는, 선 몇 개로 이루어진 윤철의 담백한 초상화처럼 윤철에게 그동안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과 언어과 마음의 짐은 조금씩 덜어내지고 있었다.
시간은 지나 도맹의 생일날 윤철은 자신이 그동안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던 현실과는 받대 되는 말을 듣는다.
주지스님으로부터
"애 낳느라고 고생하셨어. 이만큼 키우고"
도맹으로부터
"포기하지 않으셨잖아요? 안 버리고 지켜봐 주셔서 감사하죠"
부모로서 낙제점이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윤철에게는 두 사람의 인정이란 진실된 표현이 아니라, 단순한 형식적인 덕담처럼 들릴 뿐이다.
그리고 윤철과 도맹의 대화가 이어진다.
(윤철) "제가 행자님을 버릴 수도 있는 겁니까?
(도맹) "그때 거사님 죽을 뻔했잖아요"
개인적으로 윤철과 도맹의 다음 대화에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습은 영화 초반 카페에서의 부녀의 공격적이고, 배려 없고, 서로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찬 장면과 대비되며 나에게는 최고의 장면으로 남아있다.
윤철은 영지가 멧돼지로부터 공격을 받을까 걱정되어 산에 올랐다가 돌아오면서 도맹은 윤철에게 딸과 아버지로서의 대화를 건넨다.
도맹은 거사가 아닌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아버지에게 계를 받기 위한 정식출가를 알리고, 마지막 깨달음을 함께 나누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딸이 대학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윤철과 지나의 대화가 이어진다.
(지나) "생각 좀 해봐 진짜 뭐가 나은 것인지?"
(윤철) "모르겠어"
(지나) "할 수 있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봐."
(윤철) "안 죽어. 안 죽었잖아."
(지나) "한 번만 해봐. 나도 해 봤어."
그러곤 앞서가는 지나에게 윤철은 소리친다.
(윤철) "같이 가자"
"같이 가자"는 말은 윤철은 도맹과 뜻이 통하였고, 도맹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게 된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정답이 있어 그에 어울리게 살아야 하며, 자식보다는 더 나아야 한다는 생각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도맹이 계를 받기 위해 떠나는 것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옛 선사들의 오도송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때 아무도 나를 좋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나를 좋아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잣나무에 올라가서 장대로 가지를 흔들었을 때, 높은 곳이 아버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어울리지 못할 곳이 있을까 싶었다"
즉 윤철은 그를 옥죄던 모든 혼란스러움과 자책과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윤철과 도맹의 변화된 마음은 다음 대화에서 확인된다.
(주지스님) "이제 강원으로 떠나서 계를 받고 진짜 스님이 되는 거야"
(윤철) "결정했습니까?
(도맹) "네"
(주지스님) "돌아올 수 있는 길이야 막힌 길도 아니고"
(윤철) "오랜만에 저기 해외전화를 해봐야겠네요"
도맹이 피식 웃는다.
(도맹) "조금 전에 이미 통화했습니다."
(윤철) "벌써요?"
윤철은 도맹이 중요한 결정을 이혼한 전 부인에게 먼저 이야기했다는 것에 살짝 실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는 중 주지스님은 짓궂은 듯한 미소를 도맹에게 보낸다.
(주지스님) "어머니가 먼저야?"
(도맹) "늘 옆에서 지켜 봐 주시는 분이 어머니죠!"
윤철은 주지스님과 도맹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주지스님) "그렇지! 거사가 고생했어. 잘 키웠어."
(지나) "고맙습니다."
(윤철) "고맙습니다."
윤철의 고정관념 속에는 "어머니"라는 말에는 생물적 여성성이 늘 전제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성이기 전에 늘 옆에서 지켜봐 주고 응원하는 그런 것이 더 본질적인 말 뜻이리라. 아마도 이 장면을 통하여 윤철은 앞서 "믿는다"라는 말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이 언어가 주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윤철은 도맹을 믿고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며, 잘 키웠다는 주지스님의 말이 그냥 건네는 형식적 덕담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윤철에게도 도맹에게도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고, 길을 잃었어도 돌아오지 못할 길은 없다.
絕海孤島-저 바다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 자등명 법등명에 나오는 섬과 같이, 풍랑에 휩쓸려 다니는 그대에게 안식처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 모두 그저 훨훨 자유롭게 살기를...
다음에서 검색해 보면, 개봉 당시 이 영화의 본 관객은 4000명을 조금 넘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이러한 영화는 OTT를 통해서라도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
아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우리 각자는 각자의 질문이 있고,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이것도 고정관념이고 이 영화가 남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나의 편견이다.
아무쪼록 당신이 길에서 방황할 때, 그 갈림길에 이 영화가 등장해서 어떤 길이건 가도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한마디 던져주는 그런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월터가 힘들게 찾아간 숀 오코넬에게서 처음 목적한 25번 사진을 얻지 못했으나, 되돌아보면 숀 오코넬을 찾는 모험 자체가 인생의 중요한 과정이 되었던 것을 월터가 깨달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