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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ㅇ Nov 07. 2021

성실하지 않아아 할 마음 씀에 대한 화와 별안간의 다짐

엄마의 천사병으로부터 시작한  나비효과

역시 기억은 미화되고, 멀리서 봐야 재미있지 막상 닥치면 火


그간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쓰며 기억이 미화되었었지. 이 글은 나를 화나게 하는 엄마의 천사 병에 관한 K 장녀의 분노와 이를 통한 변화의 다짐을 담은 글이다. 엄마 김소영 씨의 희생은 자식에게만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에게도 향해있는데, 이게 참 문제다. 더구나 이 천사 병으로 인해 발생한 베풂을 내가 처리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씁쓸한 건 이 병이 나에게도 전염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쌍욕 나오는 대목)


   내 주변 인간들 한정, 천사 병은 대부분 여자에게만 발병한다. 최근에 엄마가 전화해 말한 두 가지 가족의 이슈를 꺼냈고, 이 두 이야기는 연달아 나를 화나게 했다. 첫 번째는 30대 중반 먹도록 자릴 못 잡는 큰삼촌의 아들 때문에 큰삼촌이 힘들어하니 위로의 말을 전해야겠다는 것이다. 큰삼촌의 아들로 말할 것 같으면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와서 줄곧 ‘전세’를 살았으며, 공무원 3년, 보험 설계사 3년, 식당 일 3년을 한 뒤 최근 친구 따라 인도네시아로 떠났는데, 이 친구가 자리를 잡고 나발이고 약 15년간의 “네 꿈을 펼쳐라”를 가산을 탕진하며 하는 큰삼촌의 아들이 나는 제일 행복해 보이는데, 왜 엄마는 위로를 한다는 건지. 살 만 하니까 자식의 꿈잔치를 도와주는 거 아닌가? 이 얘기의 빡 침이 슬슬 올라올 무렵 이어서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방에 살던 막내 삼촌의 아들이 급하게 월세를 구해야 하는데, 나에게 삼촌 아들의 월세방 구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것. 막내 삼촌의 아들은 공부밖에 몰라서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내가 받은 정보는 삼촌의 회사 주소, 보증금과 "네가 야무지니까 해야지"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한 마디

**위 단락은 한 문장이 랩 같네**


  이 이야기까지가 금요일에 엄마와 나눈 대화였고, 화가 났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엄마로부터 온 불길한 전화. 당장 다음 주에 입주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주말에 바빠”라고 얘기하자 너는 왜 항상 바쁘냐는 핀잔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나 4시에 집 구하러 근처 부동산 가보려고, 저도 시간 되면 와”라는 새벽 2시에 헤어진 연인에게 보낼 법한 여운 쩌는 문자를 연달아 보내 기어이 나를 그곳으로 소환했다. 슬프게도 착착착착 문제를 해결하는 습성이 몸에 밴 나는 20년 넘도록 10마디도 안 해본 막내삼촌 아들을 위해 1시간 만에 적당히 괜찮은 집을 구해주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리고 그 옆에서 “역시 네가 똑똑해”라 말하며 뿌듯해하는 김소영 씨를 보는데, 여러 감정이 뒤섞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나는 실로 오랜만에 빡이 쳤다.  

**위 단락 또한 한 문장이 랩 같네**


  나는 화가 났다. 화를 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 나한테 전화 한 통화 없이 엄마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막내 삼촌일까, 본인이 살아야 할 집임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공부밖에 모른다'는 막내 삼촌의 아들일까, 집을 구해준다고 막내삼촌에게 호언장담하고, 나를 재촉한 엄마일까? 누구에게 먼저 화를 내야 할까? 이 화는 순전히 개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생긴 문제는 아닌 듯한데 저 셋 중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인가? 이 생각은 꼬리를 물기 시작하더니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느냐는 답 안나오는 문제에 직면을 한 것이다...


 나는 왜 대한민국 장녀로 태어나
야무지게, 친절하게, 관대하게 살아야 하는 미션을 받았을까?
내가 아들이었다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들 이름을 족보에 올린 그자들이
순순히 이혼해주었을까?
내가 아들이었다면 이혼하고 양육비를 주지 않았을까? 


  내가 대한민국에서 무책임한 아버지와 희생정신이 강한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난 것은 큰 비극이다. 나는 첫째이므로, 아버지가 떠나면 그 대신 책임감 있는 가장 역할을 해야 하고, 야무지게, 친절하게 대하기 위해선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이 역할은 가족뿐만 아니라, 회사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에 거절하지 않았으며, 조그만 실수에도 나를 과도하게 탓하며 자책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란, 일을 많이 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말 같지도 않은 일잘러의 기준을 만들어대며 셀프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언제, 어디서든 되도록 입을 다물었다. 불편하단 얘기를 하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받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회의 시간에 말이 많고 빠른 사람들을 보면 불편해했다. 내가 회사에서 본 말이 많고 말의 속도가 빠르고 불편함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얘기하는 대부분의 성별은 여성들이었고, “여자들은 말이 많아 피곤해”라는 식의 반응이 싫어 입을 다무는 쪽을, 그리고 의견을 되도록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였다. 대다수의 일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한정된 발언 시간을 갖는 여성들은 어찌 보면 생존을 위해 말이 빨라지고, 짧은 시간 안에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말의 논리를 탄탄하게 만드는 훈련을 엄청나게 했을 것이라는 것은 최근에서야 생각하게 된 대목이고 말이다. 


  나의 입 닥치고 진행하는 습관은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될 똥까지 치우는 사태까지 만들고 있는 상황을 둘러보자니, 나는 이제 불편함을 내 입으로 똑똑히 말해야겠다는 생각한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라는 말에 눈치 보지 않고 지금부터라도, 아이가 말을 처음 배우듯 내 감정 상태에 대해, 내가 하고자 하는지에 관한 의사를 얘기해야겠다. 여성/남성, 장녀/차녀, 아들/딸의 이분법적인 문제에 천착하자니 답이 없고 나는 속이 타고 병이 들 것 같으니 일단 나부터 돌보자는 생각. 나는 나를 보호할 것이다. 시발 나는 그 동안 너무도 나 자신을 보호하지 않았다. 나는 못하는 걸 못한다고 얘기해야 한다. 못하겠다고 얘기해야 한다. 애쓰지 말아야 한다. 정말 그래야만 한다. 근데 이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이 글은 울화통랩에서 시작해 전결이 없는 다소 찜찜한 끝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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