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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랑 Oct 28. 2024

천천히 마침내 사라지는 기억 상자

호랑이 아빠의 척추 협착 수술 후 섬망 그러나 치매


 “쌀 한 가마니 팔아 갖고 서울로 왔으야. 니 할아부지가 날 서울로 올려 보내믄서 그라드라. 거 가면 배는 안곯는다믄서. 종일 일하구 밤에사 누우면 어찌나 동생들이 보고 싶은지. 날마다 울었는디. 그래도 니할아부지가 독하게 집에 못오게 하대. 그 섬 촌구석에서 하도 먹을 것이 없응께, 내를 보내믄서 '배불리 묵을 수 있으면 그기가 니 집이여' 그라드라고. 그래서 다 했제. 할 수 있는 일은 나가 제일 잘했어.  느그 엄마랑 막 결혼하믄서 테이블 세 개짜리 해장국집을 했는디. 이듬 해 니가 태어나구, 장사가 잘되니께 '복덩이가 태어나 박사장이 돈을 긁어모으네' 이라고 입 달린 사람들은 싹 다 한 마디씩 할 정도로 장사가 겁나 잘됐으야. 잠잘 수 없을 만큼 바빴제. 힘든지도 몰랐어야.”


 맨 손으로 일군 아빠의 자수성가 일대기는 경이롭다. 독립 운동가 이야기를 들으면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다가도 ‘만약에 나라면?’이라고 자문하면 이내 고개를 저으며 독립운동가를 존경하는 마음만 깊어지는 경험, 모두 있으리라.

나는 나의 아버지를 깊이 존경한다.




아빠의 자수성가는 육신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귀와 코와 발의 동상, 허리와 어깨의 통증, 급성 B형 간염, 고혈압 등등. 무엇보다 척추 협착의 통증에 고통스러워했다. 고령의 나이에 수술은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우리들에게 수술 중에 죽어도 좋으니 나는 이 수술을 꼭 해야겠다며 두말하지 말라는 으름장을 놓는 아빠에게 우리들은 늘 그래왔듯이 또 한발 후퇴하며 물러섰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한 아빠를 축하하기 위해 스무 명 남짓한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빠는 손주들의 이름을 짝지어 부르지 못했다. 함께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듯 아빠의 공허한 눈빛은 허공을 헤매었고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당황하는 손주들을 지나쳐 이내 침실로 들어가 잠으로 빠져 들었다. 며칠 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위해 아빠의 사랑하는 동생들이 아빠와 함께 하는 고향으로의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설명할 길 없이 아슬아슬하고 낯선 아빠에게 적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빠의 세계에서 계획된 일을 미루거나 변경할 수는 없었다. 여행에 관한 이야기만 꺼내면 다짜고짜 화부터 내니 어찌할 도리가 없기도 했지만, 어이없게도 그 익숙한 불호령을 들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작은 아빠들과 고모들은 여행 내내 온전치 못했던 아빠의 컨디션을 걱정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아내는 우리들은 아빠의 고집이 불러온 여파와 그 파고를 잘 넘겨내겠다는 다짐을 약속하며 통화를 마쳤다.



 

아빠는 신생아로 다시 태어난 듯 틈만 나면 침실로 향했다. 침대까지 가는 걸음걸이는 앞으로 꼬꾸라질 듯 위태위태했다. 묻는 말을 한 번에 대답해 내지 못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해야 했고, 돌아오는 답은 설명이 사라진 단답형의 짧은 대답이었다. 먹지 않았던 음식들을 먹어야겠다며 먹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노여움을 풀지 않았고, 서비스로 제공되는 사탕, 냅킨, 비닐봉지, 과자 등을 주머니가 터져라 쑤셔 넣어 챙겼다. 백 살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하니 매년 최고로 좋은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던 아빠가 살고 싶지 않다, ’ 슬프다’ ‘귀찮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살아서 뭐 하냐’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고 그 횟수가 늘어났다. 사춘기 아이만큼 널뛰는 아빠의 감정기복이 충돌하며 만들어낼 독설들로 상처받을 엄마가 걱정스러웠다. 빠르게 예약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동생들에게 했고 우리들은 저마다 분주해졌다.


 아빠는 당신 스스로를 독하고 강하고 똑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아빠의 말을 듣는 그 누구도 아빠의 말에 토 달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잔뜩 긴장한 채 신경과 진료실에 앉았다.


   검사 결과, 알츠하이머 치매는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런데  ~~~~~ 환자분은 루이소체 치매로 보이네요.“

 

길지 않았던 담당 의사 선생님의 설명은 다 아는 말인데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귓전에 강렬히 꽂힌 첫 문장이 선사한 기쁨과 안도가 컸던 탓인지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화사했다. 하긴 나도 터져 나오는 환호를 입술을 여미며 막아냈을 정도였으니 이어지는 설명들은 아빠와 엄마에게 무쓸모했겠지. 차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설명을 이어가는 담당의를 쫓아 알아듣기 위해 안간힘을 내며 익숙하지 않은 병명을 다시 되물어 얻어낸 대답을 가져간 수첩에 받아 적었다.


루이소체 치매,

너는 누구니?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아빠와 엄마. 기뻐하는 부부에게 찬물을 끼얹을 용기가 없는 딸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대충 둘러대기엔 처방전이 좋다. 처방 받은 단촐한 약의 복용 방법을 설명해 드리고, 치료제는 아니지만 진행 속도를 늦추는 데에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을 얹었다. 더는 못하겠다 싶어 그렇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분주한 지하철 구석에서 가족 단톡방에 올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냥 아까 말씀드릴 걸 그랬나. 카톡이 쉬울 거라 착각했던 내 생각이 짧았다.


‘아빠는 아빠는 알츠하이머 치매는 아니야. 루이소체 치매래. 초기에 기억력 저하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운동 능력에서는 진행 속도가 알츠하이머 치매보다 빠를 수 있고, 신체적인 증상은 파킨슨병과 유사한 점이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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