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발표자료와 계획서는 다른 문서다

by 여철기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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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서를 그대로 옮긴 발표가 실패하는 이유

심사 현장에서 이런 장면을 자주 본다.

발표자가 열심히 설명한다. 슬라이드는 꼼꼼하다. 내용도 빠진 게 없다. 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이 조용히 메모를 접는다. 인상에 남은 게 없다는 신호다.

반대 장면도 있다. 발표 시간이 10분도 안 됐는데, 심사위원 한 명이 "이 과제, 괜찮은데"라고 중얼거린다. 슬라이드가 화려해서가 아니다. 뭔가 머릿속에 꽂혔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계획서를 그대로 옮기면 생기는 일

많은 연구자들이 발표자료를 계획서 요약본으로 만든다. 이해할 수 있다. 계획서에 공들였으니, 그걸 압축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계획서와 발표자료는 역할이 다르다.

계획서는 읽는 문서다. 심사위원이 혼자 시간을 두고 검토한다. 빠진 항목이 있으면 감점한다. 그래서 항목을 순서대로, 빠짐없이 채우는 게 맞다.

발표는 듣는 문서다. 심사위원은 이미 계획서를 읽고 들어온다. 발표 시간은 짧고, 여러 과제를 연달아 본다. 처음 30초에 인상을 못 심으면, 나머지는 흘러간다.

계획서는 누락 방지가 목표다. 발표는 판단 유도가 목표다.

같은 내용을 담더라도, 구조와 순서가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심사위원은 세 가지를 묻는다

오랜 시간 R&D 심사 현장을 들여다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심사위원의 머릿속에는 항상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이 과제가 평가 기준에 맞는가. 아무리 좋은 발표도 항목이 빠지면 탈락이다.

둘째, 왜 이 과제여야 하는가. 수십 개의 발표를 들은 뒤에도 기억에 남는 과제가 있고, 사라지는 과제가 있다. 차이는 메시지다.

셋째, 이 과제가 실패하지 않겠는가. 좋아 보여도 불안이 남으면 점수를 주지 못한다. 심사위원은 책임을 진다.

이 세 가지에 답하지 못한 발표자료는,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약하다.


다음 글에서는 이 세 질문에 답하는 발표 구조를 정리해보려 한다. 내가 붙인 이름은 PMR 원칙(Pass, Message, Risk)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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