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단상]AI가 빼앗은 건 일이 아니라, 핑계다

by 여철기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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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도입하면 일이 줄어든다고 믿는다.
틀렸다. 줄어든 건 일이 아니라 변명이다.


일의 무게중심이 이동했을 뿐이다.


조사에 3일 걸리던 일이 30분이 됐다.
작성에 일주일 걸리던 보고서가 하루 만에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해졌는가.


아니다.
그 시간은 그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기획과 검토,
바로 양 끝이다.


예전에는 가운데가 길었다.
그래서 양 끝이 허술해도 버텼다.


기획이 부실해도
조사 과정에서 조금씩 보정됐다.


검토가 대충이어도
“사람이 쓴 글”이라는 이유로 넘어갔다.


시간이 품질을 대신했다.


AI는 그 구조를 무너뜨렸다.


이제 조사와 작성은 거의 즉시 끝난다.
중간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두 가지뿐이다.


“무엇을 시킬 것인가.”
“이게 맞는가.”


전자는 기획이고,
후자는 검토다.


그래서 묻는다.


지금 당신의 시간은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


프롬프트를 잘 쓰는 능력이 실력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진짜 실력은
좋은 질문을 설계하는 능력과
나쁜 답을 걸러내는 능력이다.


나는 1,000건 넘는 정부 R&D 과제를 평가해왔다.


AI 도입 이후,
사업계획서는 분명 더 좋아졌다.


문장은 매끄럽고,
구성은 정돈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좋은 계획서는 늘지 않는다.


왜일까.


기획이 얕기 때문이다.
검토가 없기 때문이다.


AI가 만들어준 문장 위에
왜 이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리고 더 치명적인 문제.


본인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도 의심하지 않는다.


AI는 결국 두 가지를 빼앗았다.


“시간이 없어서 못 했다”는 핑계,
“바빠서 못 봤다”는 핑계.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당신의 생각.


AI는 가운데를 비워줬다.
그건 쉬라는 뜻이 아니다.


양 끝에서 더 오래 버티라는 뜻이다.


기획에서 멈춰라.
검토에서 버텨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라.


지금 나는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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