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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그 너머 5]

-명함 한 장의 무게 : 빈 손의 어색함-

by 여철기 글쓰기

회사를 나온 이후,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의외로 작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명함이었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작은 종이 한 장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큰 빈자리를 남길 줄 몰랐습니다.


거래처 분들을 만날 때마다 "아, 명함을 준비 중입니다"라는 말로 넘어가려 했지만, 그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시선에서 읽히는 것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어떤 의문이었죠. '이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사업을 하고 있는 걸까?'


사회에서 명함이란 단순한 연락처가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고, 신뢰의 첫 번째 징표였습니다. 명함 없는 사업가는 마치 신분증 없는 시민 같았달까요.



작은 시작의 무게


결국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직접 나섰습니다. 로고 디자인에 신경 쓸 여유도, 전문가에게 맡길 그 몇 푼도 아까웠기에 직접 로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나온 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냥 한숨 나오는 수준이었죠.


다행히 제 사정을 아는 지인 중 한 분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창업 축하한다며" 하시면서 명함 2판을 무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순간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제 명함을 받아들었을 때의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겨우 명함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지와 불안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사업가'가 된 것 같은 실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죠.


열심의 증거, 그러나


명함을 가지고 나서는 정말 열심히 나눠줬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는 명함이 제가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처럼 느껴졌거든요. 명함이 줄어들 때마다 '오늘도 뭔가 했구나' 하는 작은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명함이 줄어든다고 해서 일이 늘어나는 건 아니더라고요. 때로는 받은 명함을 서랍 어디엔가 넣어두고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작은 연결고리가 큰 기회로 이어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죠.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것들


변한 건 제 명함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함을 보는 시선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받으면 대충 보고 주머니에 넣어두곤 했는데, 이제는 정말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명함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더라고요. 회사 규모, 업력, 그 사람의 포지션은 물론이고, 심지어 명함 종이의 질감이나 디자인에서도 그 회사의 철학이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급 용지에 금박까지 들어간 명함을 받으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 회사는 이런 것에 투자할 여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반대로 저와 비슷하게 심플하고 소박한 명함을 받으면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분도 저처럼 치열하게 시작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되더라고요.


작은 거울이 된 명함


요즘도 가끔 제 명함을 꺼내 보곤 합니다. 처음 만들 때는 급하게 만든 티가 났지만, 지금 보니 나름의 정성과 간절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그 시절의 저를 대변하는 작은 증표라고 할까요.


명함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나? 이 명함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장했나?' 때로는 만족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명함 한 장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습니다. 그 안에는 꿈과 현실, 희망과 불안, 그리고 매일매일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앞으로 새 명함을 만들 때가 오면, 그때는 좀 더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디자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처럼 처음 창업해서 명함을 만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은 소박할지라도, 그 명함에는 분명히 당신의 진심이 담겨 있을 거라고. 그 진심만큼은 어떤 고급 명함보다도 값지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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