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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패턴을 넘어 필요성을 증명하라

-AI와 평가위원이 동시에 좋아하는 문서의 비밀-

by 여철기 글쓰기

2025년 5월, 한 계획서가 68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탈락했습니다.

구조는 완벽했습니다. 피라미드 원칙을 따랐고, 정량화도 잘했으며, 문장도 명확했죠. 패턴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평가위원도 "괜찮은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서 평가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데?"

필요성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패턴은 기본일 뿐이다]


이 시리즈는 패턴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AI와 평가위원 모두 패턴을 인식한다고 했죠. 읽기 쉬운 문서가 점수를 올린다고 말했고, 3레벨 구조를 설명했으며, AI와 사람의 역할을 나눴습니다.

모두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건 기본입니다. 패턴을 잘 유지하면 기본은 합니다. 70점 근처는 받죠. 하지만 거기서 멈춥니다.

80점 이상, 안정적 합격을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평가위원이란 사람을 설득해야 합니다. 동감을 얻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작성자인 사람의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무엇을 설득해야 할까요? "왜 이 기술개발이 필요한가"입니다.


[평가위원이 가장 싫어하는 것]


10년간 평가위원들과 이야기하면서 공통적으로 들은 말이 있습니다.

"제일 답답한 게 뭔지 아세요? 필요하지도 않은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거예요. 아무리 잘 써도 '그래서 이게 왜 필요한데?'라는 의문이 들면 점수를 줄 수가 없어요."

평가위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형식이 엉망인 계획서가 아닙니다. 필요 없는 기술개발입니다. 아무리 패턴이 완벽해도, 구조가 훌륭해도, 문장이 매끄러워도 "왜 이걸 개발해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탈락합니다.

반대로 형식이 좀 부족해도 필요성이 명확하면 합격합니다. "아, 이건 정말 필요한 기술이네. 현장에서 절실하겠구나"라고 느끼면 평가위원은 점수를 줍니다.


[필요성은 어디서 오는가]


그렇다면 필요성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가장 먼저 문제가 명확해야 합니다. "시장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기술 개발이 필요합니다" 같은 일반론이 아니라 구체적 문제 말이죠. "부산 공장 야간 조에서 불량률이 12%입니다. 조명이 어둡고 작업자가 피곤해서입니다. 연간 3억원 손실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쓰면 평가위원은 "아, 진짜 문제네"라고 느낍니다.

현장이 정말 원하는지도 중요합니다. 당신이 생각한 문제가 아니라 고객이 토로한 문제여야 합니다. "우리 고객사 A사 구매 담당자가 '불량 때문에 계약 끊을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습니다"라고 쓰면 필요성이 살아납니다. 누군가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대안이 없다는 것도 보여줘야 합니다. "기존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A방법은 비용이 2배 들고, B방법은 정확도가 60%밖에 안 되고, C방법은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평가위원은 "기존 걸로 하면 되잖아"라는 의심을 품습니다. 선제적으로 답해야 합니다.

시장 규모도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절실해도 당신 회사만의 문제라면 정부 지원 대상이 아닙니다. "같은 문제를 겪는 중소기업이 전국에 230개 있습니다. 잠재 시장은 연 1,500억 규모입니다." 이래야 공공성이 보입니다.


[사람이 쓴다는 것]


AI는 필요성을 못 씁니다. "시장 조사 결과 수요가 확인되었습니다"라는 일반론만 내놓죠.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3년 전 주요 고객사가 계약을 끊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불량 때문이었죠. 그날 밤 긴급회의를 열었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이 기술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문장은 AI가 못 씁니다. 경험이 없으니까요. 절실함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한 문장이 평가위원을 움직입니다. "아, 이 사람들 진짜 절실하구나. 필요해서 개발하는 거네."

필요성은 데이터로만 증명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경험, 고객의 목소리, 현장의 절실함이 필요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만 쓸 수 있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본질이다]


패턴은 중요합니다. 읽기 쉬운 구조, 정량화, 일관성, 명확한 문장. 모두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70점을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80점 이상은 본질에서 나옵니다. 왜 이 기술이 필요한가, 누가 이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가, 기존 방법은 왜 안 되는가, 시장은 얼마나 되는가.

평가위원은 형식을 보지만 본질로 판단합니다. 아무리 패턴이 완벽해도 필요성이 안 보이면 탈락합니다. 형식이 좀 부족해도 절실함이 느껴지면 합격합니다.

당신의 계획서를 다시 보세요. 구조는 완벽한가요? 좋습니다. 이제 질문하세요. "이 기술, 정말 필요한가?" 평가위원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세요.

패턴은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건 필요성입니다. 형식을 갖추되, 본질을 잊지 마세요. 그게 합격의 마지막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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